이야기와 논리 사이에서 살아가기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우리는 종종 이야기로 답한다.
눈이 내리던 밤, 말없이 건네던 체온,
헤어짐을 예감했던 마지막 대화 같은 것들로.
그 기억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우리 안에 머문다.
사랑은 그렇게 ‘이야기처럼’ 남는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사랑을 설명하려 한다.
호르몬의 반응, 애착의 패턴, 진화적 본능 같은 언어로.
그 설명은 어딘가 맞는 말 같지만,
설명이 끝난 자리엔 이상하게도 느낌이 빠져 있다.
왜 그럴까? 설명은 있는데, 정작 우리가 ‘느낀 그 순간’은 사라진 듯한 이 기묘한 감각.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건 설명이 될 때일까?
아니면 이야기로 살아날 때일까?
이 질문은 우리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인식 방식으로 이끈다.
하나는 미토스(mythos), 다른 하나는 로고스(logos)다.
미토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이야기’, ‘신화’를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토스는 단순한 전설이나 허구가 아니다.
우리가 삶을 의미 있게 느끼도록 도와주는 구조화된 이야기다.
가족의 기억, 공동체의 전통, 종교적 서사, 한 사람의 개인사 모두 여기에 속한다.
로고스는 ‘말’, ‘이성’, ‘논리’를 뜻한다.
현상과 개념을 설명하고, 세상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방식.
과학, 수학, 철학, 그리고 현대의 분석 도구들이 로고스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 둘을 함께 사용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둘은 방식이 다르다.
미토스는 느낌과 맥락의 언어고,
로고스는 원인과 구조의 언어다.
우리는 언제 미토스를 더 신뢰하고, 언제 로고스를 붙잡는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순간들이 이야기를 필요로 했고, 어떤 순간들이 설명을 요구했는가?
지금 우리는 ‘로고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데이터와 증거, 명확한 논리와 분석의 시대.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를 보고 울고, 광고를 통해 감동받고,
사람의 말을 통해 설득당한다.
왜일까?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철학은 이 둘을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 사이의 갈등과 접촉,
오해와 변형,
소통의 불가능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시도 속에서
삶을 다시 바라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삶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떤 언어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 선택이 아니라… 두 언어 사이를 건너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삶은 언제나 미토스와 로고스의 교차선 위에 있다.
우리는 그 경계에 서 있다.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것을 살아내며,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구조로
스스로를 다시 그려나간다.
철학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야기와 이성, 그 둘 사이의
끊임없는 왕래 속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커피를 내리며 문득 어제의 꿈을 떠올린다.
낯익지만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
그건 사라졌지만 어딘가 남아 있는 감각이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고 느껴지는 경험이다.
반면, 휴대폰을 열어 오늘의 일정을 점검하는 순간,
우리는 계획과 판단, 논리의 세계로 들어선다.
분 단위로 움직이는 시간표 속에서
일정과 행동, 결과와 목표가 나란히 배치된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느껴지는 세계와 설명되는 세계,
이야기로 이해하는 방식과 논리로 파악하는 방식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이 두 방식이 바로 미토스와 로고스다.
‘미토스(mythos)’는 고대 그리스어로 ‘이야기’, 또는 ‘신화’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미토스’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감각적으로 구성하고, 의미로 조직하는 삶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린 시절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그 이야기 속에는 단순한 교훈이나 정보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상상력, 공포에 대한 은유, 사랑과 보호의 감각까지.
이야기는 삶의 감정을 건드리며, 말로 다하지 못하는 것들을 전달한다.
미토스는 질문하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생겨났고, 그렇게 흘러간다고 말할 뿐이다.
세상의 이면에는 어떤 설명보다 깊은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로고스(logos)’는 ‘말’, ‘이성’, ‘논리’를 뜻한다.
세계의 작동 원리를 밝히고,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며,
사건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찾아내는 사고 방식이 바로 로고스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왔는가?
그 원리는 무엇이고,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예를 들어 별자리를 본다고 해보자.
과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신화의 이야기를 읽어냈지만,
오늘날 우리는 별의 거리, 질량, 운동 속도 같은 과학적 정보를 먼저 떠올린다.
로고스는 세상을 _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욕망_에서 출발하며,
그 설명을 통해 예측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질문 하나.
우리가 겪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순간들—사랑, 죽음, 탄생, 상실—
그 순간들을 과연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야기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미토스와 로고스는 세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언어다.
미토스는 왜 그렇게 느껴지는가를 말하고,
로고스는 왜 그렇게 되는가를 설명한다.
하나는 의미의 언어, 다른 하나는 원인의 언어다.
이 둘은 결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삶은 언제나 이 두 흐름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로고스는 세계를 분해하여 구조를 보여주고,
미토스는 그 조각들을 다시 감정과 기억, 의미로 엮어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두 흐름을 모두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둘을 넘나드는 감각—그 균형을 익히는 일이야말로
철학을 시작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
과학적 근거와 논리에 기반한 의사결정 시스템.
겉으로 보기엔, 이 시대는 분명 로고스의 시대처럼 보인다.
이성과 과학, 분석과 기술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고,
“객관적 사실”은 감정과 해석보다 우선하는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제 모습일까?
여기서 하나 질문해보자.
우리는 정말, 이성만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수많은 ‘정량화된 척도’ 위에 세워져 있다.
학업 성적, 신용 등급, 소비 패턴, 클릭 수, 알고리즘의 추천…
그 모든 것은 분석 가능한 수치와 논리의 언어로 작동한다.
정책은 데이터에 근거해 수립되고,
경제는 지표를 통해 해석되며,
교육조차 점수와 효율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이성적 분석과 객관적 판단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할까?
가장 뜨거운 정치적 선택은 데이터를 따르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브랜드는 논리보다 이미지와 감정을 팔고,
사람들은 정보보다 ‘내 이야기’를 말해주는 콘텐츠에 반응한다.
SNS를 떠올려보자.
몇 초 만에 공유되는 밈 하나,
감정을 자극하는 영상 클립 하나가
이성적 분석보다 훨씬 강력하게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는 ‘팩트’를 말하지만, 사람들은 ‘신념’을 따른다.
광고는 제품을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이미지’를 산다.
우리는 논리를 듣지만, 마음은 여전히 이야기의 힘에 움직인다.
어쩌면 지금은,
로고스의 얼굴을 한 미토스의 시대가 아닐까?
이제 미토스는 더 이상 고대의 신화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정치의 언어 속에,
브랜드의 서사 속에,
AI 알고리즘이 큐레이션한 콘텐츠의 흐름 속에
형태를 바꾸어 다시 나타난다.
겉으로는 로고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감정, 욕망, 기억, 믿음—미토스의 핵심 요소들이 살아 숨쉰다.
오늘의 세계는 확실히 로고스가 구축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을 실제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건 여전히 미토스다.
우리는 이성과 논리로 구조를 세우지만,
그 구조를 채우고 넘치는 건 언제나 이야기와 감정, 신념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단순히 로고스의 시대가 아니라,
로고스를 통과해 다시 미토스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자.
우리는 앞으로, 이야기를 자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로고스의 언어 속에 미토스가 숨어든 채로
여전히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이야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될까?
이 질문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온 ‘이성과 논리의 우위’를
다시금 검토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
로고스는 정말, 미토스를 해체하고 난 뒤에야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두 개념을 다시 짚어보자.
미토스(Mythos) : 세상의 기원, 인간의 본성, 삶의 의미를 이야기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고대의 신화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품는 감정의 서사, 가족의 역사, 종교적 믿음도 모두 미토스의 형태를 띤다.
로고스(Logos) : 원리와 논리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개별적인 사건을 넘어서 보편적 규칙과 인과관계를 찾는 사유 방식이다.
미토스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이고,
로고스는 추상적이고 구조적인 설명이다.
그래서 로고스는 미토스를 해체함으로써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를 추구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보편성이란, 반드시 미토스를 해체한 이후에만 가능한 것일까?
서양 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아낙시만드로스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물질의 원리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감각적 세계(=미토스적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진리란 그것을 넘어서 이데아라는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라 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종교적 신념과 신화적 질서를 이성의 빛으로 해체했고,
칸트는 인간의 이성 안에서 보편적 도덕 법칙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은 로고스가
미토스의 구체성과 특수성을 걷어냄으로써,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반 원칙을 세우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번 질문해보자.
보편성은 해체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보편성은 오히려 이야기의 층위에서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미토스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공동체가 자신을 이해하고 규범을 세우며,
삶의 방향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약한 자를 돕는다’는 도덕적 가치.
이것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다.
한 아이가 겪은 고통,
어떤 공동체가 보여준 연대,
소설 속 주인공의 용기…
이런 미토스적 경험 속에서도,
보편적 감정의 토대와 윤리적 직관이 피어난다.
그럼 이렇게 다시 물어볼 수 있다.
로고스는 미토스를 해체해야만 보편성을 얻는가,
아니면, 미토스를 통해서도 보편성이 발현될 수 있는가?
20세기 이후의 철학자들은
로고스의 완결성과 우월함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는 오직 문맥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했고,
푸코는 ‘진리’조차도 시대와 권력에 따라 구성된 이야기라고 보았다.
데리다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해체 그 자체를 사유의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말한다.
로고스는 완전하지 않으며,
결국 인간은 미토스적 존재다.
즉, 진리를 말하려면
단지 ‘논리’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종종 미토스를 해체하며
보편성에 도달하려 했다.
하지만 미토스는 단지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의미가 응축된 차원이다.
해체는 한 방식일 뿐,
보편성은 해체 이후가 아니라,
미토스를 품은 채로도, 다른 결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로고스와 미토스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 아닐까?
로고스는 오랫동안 완전한 설명을 꿈꿔왔다.
논리, 수학, 과학의 체계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그 구성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20세기 초반,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은
하나의 일관된 논리 체계 안에서 수학의 모든 진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른바 '수학의 형식주의적 완성'을 향한 시도였다.
이 믿음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 힐베르트(David Hilbert)였고,
그는 이를 '결정 문제(Entscheidungsproblem)'라는 형태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야심찬 꿈은 쿠르트 괴델(Kurt Gödel)에 의해 무너진다.
1931년, 괴델은 두 개의 정리를 통해
논리 체계의 근본적인 한계를 증명해냈다.
이는 단지 수학의 문제를 넘어,
인간 이성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어떤 형식적 체계 안에는, 그 체계 내에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이는 모든 체계가 스스로를 온전히 포괄하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진리는 언제나 체계의 외부를 예비한다는 뜻이다.
수학적으로 엄밀한 체계 안에서도,
"이 명제는 증명할 수 없다"는 식의 자기언급적인 명제 가 생겨나며,
이들은 체계의 외부로 사고를 확장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체계가 자기 자신이 모순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즉, 체계는 자기 자신의 무모순성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다는 한계에 이른다.
그 정당성은 필연적으로, 체계 외부의 타자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닫힌 체계의 내부로부터는, 그 체계의 완결을 입증할 길이 없다.
체계는 언제나 자기 바깥의 시선 없이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한계의 선언이자 반성의 요청이다.
이 두 정리는, 단지 한 명의 수학자의 증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로고스 자체가 가지는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낸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지만,
그 설명은 항상 그 바깥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체계는 자기 완결을 꿈꾸지만,
완결을 향할수록 오히려 자기 바깥을 열어야만 지속될 수 있다는 패러독스를 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된다.
진리를 향한 사유는,
언제나 하나의 닫힌 체계 안에서 가능한가?
아니면, 진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운동속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로고스는 실패한 것일까?
로고스의 진정한 힘은 닫힌 체계를 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허물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 취약함이야말로, 사유를 확장하는 틈이 된다.
그렇다면, 진리를 향한 사유는 한 방향만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로고스의 그림자가 드리운 그 틈 사이로
다른 방식의 보편성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어떤 이야기는 세월을 넘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며, 그 안에서 여전히 우리를 울리고 흔드는가.
왜 어떤 서사는 그토록 다양한 시대와 문화에서, 마치 보편적인 무언가를 품은 것처럼 반복되어야만 하는가.
그 물음은 우리를 ‘미토스’로 보는 보편성이라는 주제로 이끈다.
오이디푸스, 길가메시, 홍길동, 햄릿, 프랑켄슈타인…
세부는 다르지만 이 이야기들은 어떤 근원적 질문을 반복해서 건넨다.
‘나는 누구인가?’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가?’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넘어서는가?’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하나의 인물이나 사건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초월해 되돌아오는 주제로 남는다.
이 반복성은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토스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삶을 해석하고, 고통을 담아내고,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형식(form)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등장한다.
로고스가 추구한 보편성은 일반화 가능성, 재현 가능성, 반복 실험을 통한 검증 가능성에 기반을 둔다.
이것은 수학적, 논리적, 과학적 질서의 이름으로 기능하며,
동일한 조건 아래서 동일한 결과가 도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깐다.
반면, 미토스가 추구하는 보편성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미토스는 개별 사건의 진위를 따지지 않는다.
대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상징, 감정, 서사의 구조를 통해
수많은 인간이 공명할 수 있는 정서적 보편성을 생성한다.
우리는 실연의 고통을 겪을 때 로고스를 찾기보다, 실연을 다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를 통해 아픔이 해석되고, 맥락이 주어지며, 감정이 정돈된다.
그리고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것이 미토스의 보편성이 발현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왜 인간은 이야기 없이 살 수 없을까?
왜 설명이 아닌 이야기로써 우리는 더 깊이 연결되는가?
로고스가 끝을 선언한 자리에서, 왜 또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여기엔 미토스만의 독특한 속성이 있다.
시간을 감정과 형상으로 압축하는 능력.
한 서사가 다시 반복될 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개인의 경험과 중첩되며
개별적 삶을 집단적 공명 속에 배치시킨다.
즉, 미토스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이건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감정이었구나.”
라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그 순간, 개인의 고통은 우주적 리듬에 닿게 된다.
삶은 다시 해석되고,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다.
미토스는 삶을 해석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이자,
가장 넓은 공명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보편성이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수많은 존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감정에 도달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미토스는 이질적인 삶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순간,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반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현대는 흔히 로고스의 시대라 불린다.
데이터가 넘쳐나고, 알고리즘은 인간의 선택을 대신하며,
논리적 사고와 과학적 근거는 가장 설득력 있는 언어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정치를 보자. 정책의 논리보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누가 우리를 대변하는가’라는 이야기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많은 사실 왜곡과 거짓 정보를 퍼뜨렸지만,
그는 ‘진실을 말해주는 outsider’, ‘우리 편’이라는 이야기로 지지받았다.
팩트가 아니라 공감된 이야기가 힘을 가졌다.
‘정치적 올바름(PC)’은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논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팩트의 다툼이 아니라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충돌이다.
표현을 규제하고, 언어를 바꾸는 것은 결국 삶의 세계관을 다시 짜는 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논리적 설명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페미니즘 또한 ‘성평등’이라는 로고스적 언어로 출발하지만,
그 내면에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해방을 외치고,
어떤 이야기들은 억압을 고발하며,
그 이야기들이 충돌할 때,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누구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중심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SNS를 통해 퍼지는 밈 정치,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번지는 신념의 집단들,
이 모든 현상은 로고스의 도구를 통해 미토스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데이터는 표면일 뿐, 그 아래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이야기다.
결국 지금 우리는
로고스의 얼굴을 한 미토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논리와 이성이 표면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야기와 신념이 더욱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질문해보자.
지금 당신의 세계관은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가?
아니면 ‘이야기’로 구성된 것을 논리로 포장하고 있는가?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우리는 거대한 데이터, 정밀한 알고리즘, 빠른 판단력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삶은 종종 메말라간다.
속도는 있지만, 방향은 없다.
정보는 넘치지만, 의미는 자주 결핍된다.
이런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야 하는가?
삶은 로고스의 질서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나아가는가는
언제나 이야기와 신념의 세계, 미토스의 자리에서 나온다.
로고스는 필요한 구조를 제공하지만,
그 구조를 움직이는 힘은 대개 서사적 직관, 감정, 상상력이다.
예컨대, 일론 머스크의 행보를 보자.
그가 만든 SpaceX, 테슬라, 뉴럴링크, 스타링크는
모두 과학과 기술의 정밀한 구조 속에 있지만,
그 배경에는 분명한 미토스가 있다.
인류를 화성으로 이주시켜 ‘두 번째 행성’을 만들겠다는 우주 개척의 신화
환경과 기술의 양립이라는 지속가능성의 이야기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를 다시 구성하겠다는 신체 확장의 비전
이 모든 것은 숫자와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신념,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
비슷하게 스티브 잡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기술을 이야기로 바꾸는 탁월한 미메시스의 장인이었다.
“세상을 바꿀 도구”라는 메시지는 로고스의 세계에 기초했지만,
그것을 대중에게 전한 방식은 철저히 미토스적이었다.
사이먼 시넥이 애플의 마켓팅을 골든서클로 풀어낼 때,
제품의 중심에 담아낸 why는 그 당시 기업사회에 부재하던 미토스의 재림이었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하나의 서사였고, 애플 제품은 일상 속 신화의 토템이 되었다.
정치도 그렇다.
어떤 정책이 효과적인가보다
어떤 이야기가 더 강하게 사람들을 움직였는가가 중요한 시대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단순히 기능이 뛰어난 제품보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담은 브랜드에 더 끌린다.
교육, 종교, SNS, 사회운동…
현대는 로고스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미토스가 숨 쉬고 있다.
우리는 결국 이 둘의 진동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는 방향을 제시하고,
다른 하나는 이유를 묻는다.
하나는 구조를 만들고,
다른 하나는 동기를 부여한다.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효율과 속도의 로고스인가?
아니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의 감각을 품고 있는가?
이야기는 단지 말이 아니다.
그건 삶의 방식이고,
세계를 구성하는 태도이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신념의 지형도다.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기술을 덮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술과 나란히 걷는 이야기,
로고스와 미토스의 긴장 위에서 새로운 연결을 구성하는 이야기여야 한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살아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떤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