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접히는 자리

기록은 타인의 시간을 훔친다

by wis

누군가가 234 × 567을 3분 동안 끙끙대며 계산해서 132,678이라는 답을 얻는다. 그는 그 숫자를 한장의 메모에 적어 모니터 옆에 붙인다. 5분 뒤 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그는 다시 3분을 들이지 않는다. 메모를 한 번 쳐다보고 1초 만에 답한다.


컴퓨터도 비슷한 일을 한다. 피보나치 수열을 코드로 옮겨본 사람이라면 이 둘의 차이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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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코드는 fib(35) 하나를 구하는 데 몇 초, fib(40)은 수십 초가 걸린다. 같은 작은 계산을 수천만 번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줄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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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fib(100)을 물어봐도 즉시 답한다. 달라진 것은 단 네 줄이다. 계산에 들어가기 전에 cache라는 이름의 메모 묶음을 먼저 뒤져보고, 답이 이미 적혀 있으면 그대로 꺼내 쓴다. 없으면 계산한 답을 그 묶음에 한 장 추가한 뒤 돌려준다. fib(100)을 푸는 과정에는 fib(98), fib(97) 같은 부분 계산이 본래 수없이 겹쳐 반복되는데, 한 번 구한 답을 메모에 적어두면 그 반복을 모두 건너뛸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한 작업의 결과를 데이터로 변환하여 공간에 저장하는 일, 개발자들은 이것을 캐싱(Caching)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공간이 되는 순간


여기서 일어난 일은 정말 속도가 빨라진 일일 뿐인가. 한 번 더 보면, 시간이 공간으로 변환된 것이다. 연산에 쓸 3분을, 메모 한 장만큼의 저장 공간으로 미리 치환해둔 것. 컴퓨터 공학의 상당 부분이 이 맞교환 위에서 굴러간다.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 인터넷, 거대 언어 모델 — 모두 미래의 연산 시간을 지금의 공간에 담아두기 위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그런데 이 움직임은 컴퓨터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어떤 수렵인이 곰이 나타난 자리에 돌무더기를 쌓았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보낸 며칠치 위험이 그 돌무더기 안에 접혀 있다. 다음에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은 며칠을 쓰는 대신 1초만 멈춰 서면 된다.


어느 농부는 "경칩에 개구리 울면 쟁기를 꺼내고, 곡우에 볍씨를 담근다"는 말을 제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짧은 한 구절 안에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여러 해 헛 뿌리고 헛 거둔 시간이 눌려 있다. 다음 봄 그는 그 시간을 다시 살지 않는다.


어떤 요리사가 제 어머니의 레시피를 종이에 옮겼다. 어머니가 평생 손과 혀로 익힌 감각이 종이 한 장의 글자로 옮겨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시간은 그 종이 안에 남아 있다.


모두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공간에 고정시키려는 몸짓이었다.


시간은 엔트로피에 떠밀려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우리가 겪은 일은 점점 흩어지고, 기억은 점점 희미해진다. 기록은 그 소실에 맞서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동작이다. 공학자가 '캐시'라고 부르는 매끈한 알고리즘은, 실은 수만 년 된 인간의 습관을 기계의 언어로 옮겨놓은 것에 가깝다.





메모가 자리를 옮길 때


메모 한 장의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니터 옆의 메모는 그 자리에 붙어 있는 한 사람의 시간만 아낀다. 그런데 메모가 자리를 옮기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군가 작업 중 떠오른 메모를 정리한다. 그 메모가 쌓여 강의 자료가 된다. 강의 자료가 다듬어져 책이 되고, 책의 한 단락이 다른 사람의 인용문이 되고, 녹음된 강의가 누군가의 새벽에 다시 재생된다. 같은 기록이 자리를 바꿀 때마다 새 값이 붙는다. 한 장의 메모가 수백 번 재사용되는 셈이다.


이 글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이 주제에 관해 남긴 수십 개의 메모, 대화 중 떠오른 한마디들, 책에서 밑줄 친 몇 개의 문장, 산책길에 녹음해둔 음성 메모. 이 글의 모든 문장은 그 기록들의 재조합이다. 지금 이 문장조차 어느 날 새벽의 다른 문장들이었다.





누군가의 3년을 3시간에 푼다는 것


여기까지는 기록이 미래의 나에게 건네는 선물처럼 보인다.


수학 문제를 풀다 노트를 써본 적이 있다면 이 선물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 번 진땀 빼며 풀어낸 문제가 있으면, 그 풀이의 결정적인 한 수 — 어디서 치환을 걸었는지, 어떤 보조선을 그었는지 — 가 노트의 한 줄로 접혀 들어간다. 일주일 뒤 비슷한 문제를 만나면, 3시간의 막힘이 3분으로 줄어든다. 지난번 내가 건너간 길이 그 한 줄 안에서 다시 펼쳐지기 때문이다. 필기는 방금 내린 판단의 경로를 공간에 접어두는 일이다. 들뢰즈라면 이것을 주름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기록을 펼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책 한 권은 저자가 3년을 쏟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3년에는 그가 읽은 수백 권이 이미 녹아 있다. 그 수백 권은 또 다른 저자들의 수십 년씩을 담고 있다. 당신이 그 책을 3시간 만에 읽을 때, 압축되어 있던 수백 년이 당신의 3시간 안에서 풀려 나온다. 수학 교과서 역시 — 수백 년의 수학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판단을 접어 넣은 누적 노트다.


기록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시간을 훔쳐 쓰는 사람이다. 뉴턴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섰다"고 말한 것은 이 구조를 오래전에 이미 본 자의 짧은 인사였다. 거인의 어깨는 주름진 표면이다. 수백 년의 판단이 접혀 있어서, 올라서 펼치면 지도가 된다.


누군가는 평생에 걸쳐 혼자 힘으로는 결코 닿지 못할 높이에 도달한다. 그가 특별히 영리해서가 아니라, 수천 명의 시간을 꺼내 쓸 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자원을 평등하게 하루 24시간씩만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24시간 안에 남의 100년을 끌어다 쓴다.





간격


레시피를 읽는 것과 실제로 그 요리를 해내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코드를 읽는 것과 그 코드를 돌려 무언가를 만드는 것 사이에도 있다. 악보를 보는 것과 연주하는 것 사이에도. 타인이 압축해둔 시간을 내 행동으로 풀어내려면, 나 역시 그 분야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쓴 적이 있어야 했다. 훔친 시간은 그 자체로 내 것이 되지 않았다. 풀어낼 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었다.


오랫동안 글을 읽는 능력은 소수 계급의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 기술은 소수의 것이었다. 전공 훈련을 받은 이들만이 진짜로 거인의 어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거인의 발밑에서 그림자만 바라보았다.





AI는 이 간격에 들어왔다


AI는 인류가 남긴 수많은 기록을 통째로 흡수한 존재다. 거대 언어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네트워크는, 수십억 페이지의 기록을 눌러 담아놓고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준비해둔 캐시 저장소다. 우리가 AI에게 말을 거는 것 — 프롬프팅 — 은 지금 이 순간 어떤 메모를 펼칠지 지정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AI는 기록을 꺼내는 일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 상황, 내 재료, 내 실력에 맞게 그 기록을 다시 풀어낸다. 옛 요리책의 추상적인 문장을 내 부엌에서 지금 당장 따라할 수 있는 단계로 바꿔준다. 누군가의 블로그 글을 내가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순서로 변환해준다. 더 나아가 그 순서를 코드로 옮겨 스스로 실행하기까지 한다.


이 움직임을 역캐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간에 담긴 시간을 다시 행동의 시간으로 풀어내는 움직임. 캐싱이 시간을 공간으로 접었다면, 역캐싱은 그 공간을 다시 펴서 시간으로 되돌린다.


기록에서 행동으로 건너가는 간격 — 오랫동안 숙련자만 건너던 그 다리가, 프롬프팅 한 줄로 건너는 다리가 된 것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일이, 거인의 어깨를 밟는 훈련 없이도 가능해졌다.





그런데 한 사람이 100년 전에 이미 본 것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이유, 책을 사는 이유, 강의에 돈을 내는 이유,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 —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같은 자리에 닿는다. 누군가가 이미 살아낸 시간을 가져다 내 시간으로 쓰려는 것이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거의 모든 진보가 이 위에서 일어났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 그 훔친 시간을 무엇 위에 얹으려고 하는가.


거의 100년 전 스페인의 한 철학자가 '학생'이라는 존재의 기이함에 관해 썼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마드리드 중앙대학교 1932–33년 강의를 엮어 펴낸 책 『형이상학 강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학문이 존재하고 저기 놓여 있는 이유는, 어떤 사람들이 가혹한 노력을 기울여 그것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그 학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우선 우리의 지성이 느끼는 불안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안 없이는 안식(진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학문을 창조한 사람은 그 학문이 없으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그것을 만들었다. 그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그에게는 진리였다. 그리고 오르테가는 그 불안을 느끼지 못한 채 완성된 지식을 받아 드는 자를 '학생'이라고 불렀다.


"학생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직접적이고 본연적인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는 과학들을 공부하라고 삶으로부터 강요받는 사람입니다."


거의 100년 전 그에게 이것은 교육의 비극이었다. AI가 완성된 답을 순식간에 내어주는 지금, 이 비극의 스케일은 완전히 다른 자리에 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cura


우리는 이제 누구나 거인의 어깨에 올라탈 수 있다. 다만 그 어깨 위에서 무엇을 보는지, 그 높이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거기 올라탄 나는 지금 어떤 불안을 안고 있는지 — 이 질문은 AI가 대신 던져주지 않는다.


cura. 오르테가는 하이데거를 경유해 이 라틴어를 끌어들인다. 걱정과 보살핌과 몰입을 뜻하는 cur-a에서 cur-iosidad — 호기심이 나온다고. 삶의 지독한 걱정에서 출발하는 어떤 것. 훔친 시간은 cura가 있는 자에게는 내 시간이 된다. cura가 없는 자에게는, 높이만 주고 보는 눈은 주지 않는 어떤 것이 된다.


호기심은 정답에서 자라지 않는다. 정답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게 만들지 않는다. 호기심은 발 앞에 놓인 문제, 지금 부딪히고 있는 무엇, 잠을 설치게 만드는 어떤 것 — 그 위에서만 자란다.


문제를 가진 자에게는 — 어깨 위의 풍경이 그의 문제와 만나 새로운 길이 된다.





놀이


그런데 문제에서 출발하는 호기심만이 모든 이야기일까.


오르테가의 시선에서 사유는 불안을 잠재우는 동작이었다. 무언가 없으면 무너질 것 같은 결핍, 그것을 채우려는 움직임. 그러나 같은 동작이 서 있는 자리를 더 넓게 본 사람도 있다. 질 들뢰즈라면 욕망을 결핍으로 정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망은 비어 있어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와 접속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에도 작동한다. 입이 결핍되어 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입과 음식이 만나면 식사가 생기고, 입과 마이크가 만나면 노래가 생긴다. 만남이 새 것을 낳는다.


아기를 떠올려보면 조금 더 분명하다. 아기는 무엇이 없어서 배우지 않는다. 손·입·눈이 세계와 계속 만나고, 그 만남에서 배움이 돋아난다. 배아가 주름을 늘려 기관을 분화시키듯, 만남이 몸에 접혀 들어오며 새 조직이 생겨난다. 결핍은 그 만남 안에서 가끔 도드라지는 한 결일 뿐, 전체를 움직이는 엔진이 아니다.


피터 틸이 구분한 1→n과 0→1이 여기 포개진다. 이미 누군가가 발견한 답을 내 삶의 문제 위에 복사해 옮기는 것이 1→n이라면, 이전에 없던 접속을 통해 세상에 없던 것을 내놓는 것이 0→1이다. 학습은 대개 전자에 기울고, 놀이는 대개 후자에 기운다. 그러나 학습 안에도 놀이의 순간이 있고, 놀이 안에도 반복의 무게가 있다. 칼로 그어 나뉘는 일은 아니다.


이 시선에서 기록과 역캐싱은 결핍을 메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들을 접속시키는 놀이에 가까워진다. 50년 전 누군가의 문장이 오늘 당신의 부엌에 접속된다. 어젯밤 당신의 메모가 내일 누군가의 코드로 접속된다. 각 접속에서 이전에 없던 것이 생긴다. 선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과거에 머문다. 그 문제의식을 다른 것과 접속시켜 지금 여기서만 가능한 무엇을 만들어낼 때, 기록은 무덤이 아니라 작업장이 된다.


어떤 접속은 결핍과 문제를 낳는다. 어떤 접속은 그 자리에서 놀이를 낳는다. 문제가 낳은 길과 놀이가 낳은 길은 닮은 데가 있어도 같지 않다. 다만 둘 다 접속이라는 같은 자리 위에서 일어난다.





다시 책상 위의 메모


모니터 옆에 132,678이 적힌 한 장이 여전히 붙어 있다. 누군가의 3분이 그 위에 접혀 있다.


이 한 장은 한 자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메모가 강의가 되고, 강의가 책이 되고, 책의 한 단락이 누군가의 코드 한 줄이 되고, 그 코드가 하나의 서비스가 된다. 같은 재료가 자리를 바꿀 때마다 다른 층위로 건너가며 새 값을 낳는다.


사족을 달자면, 필자의 교육철학은 미분과 적분인데 — 쪼개어 장악하는 일과, 증분을 쌓아 차원을 도약하는 일. 기록이 가진 레버리지는 그중 적분 쪽이다. 수학이 이것을 적분이라 부르고, 경제는 레버리지라 부를 뿐이라 생각한다.


시간을 접어 공간에 붙여두는 일은 사람이 수만 년 반복해온 동작이다. 달라진 것은 이제 접힌 것을 펼치는 일의 일부까지 기계가 대신 해준다는 점이다. 펼쳐진 것을 어떤 문제에 접속시킬지, 거기서 무엇을 새로 만들지는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접는 쪽도 그렇다. 내 시간을 온전히 접어두는 일은 내 손과 내 노트 시스템에 달려 있다. 시행착오를 지나는 중이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 한 장의 메모로 응축할지, 그 메모를 어떻게 다시 펼쳐 바깥과 접속시킬지 고민해볼 일이다. 거기서부터 오늘의 3분이 수많은 시간과 접속하고, 레버리지로 적분할 수 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형이상학 강의

(인용문은 국내출판한 번역본의 절판으로, 원문서적을 번역함)

사진: UnsplashKaleid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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