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에 대하여

언어 아래 숨겨진 운동에 대하여

by wis

1.

점균류 군집의 한 개체가 먹이를 찾아 길을 간다. 길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 심지어 그 끝에 자신의 소멸이 있어도, 개체는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중간에 멈춰서 이유를 재검토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두고 우리는 보통 단세포라 판단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혹은 자연의 맹목성이라 부른다. 두 해석 모두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제대로 된 운동이라면 이유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이 전제는 정말 맞을까. 이유는 행동을 만드는가, 아니면 행동이 일어난 뒤에 따라오는걸까.




1983년, 신경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이 단순한 실험을 했다. 피험자에게 손목을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라고 지시하고, 그 결정을 의식한 순간을 정확히 보고하게 했다. 동시에 뇌의 운동 준비 전위를 측정했다.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피험자가 "움직이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했다고 보고한 시점보다 약 350밀리초 전에, 뇌에서는 이미 그 운동을 준비하는 신호가 발생하고 있었다. 의식적 결정은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운동에 덧붙여진 사후 보고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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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험의 해석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 가능성이 열렸다. 우리가 "나는 이래서 이걸 했다"고 말할 때, 그 "이래서"는 행동을 일으킨 원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일상의 층위에서도 같은 구조가 보일까?


누군가 꾸준히 글을 쓴다고 하자. 왜 쓰냐고 물으면 답이 나온다. 자기 이해를 위해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쓰는 게 좋아서. 이 답들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 층 더 내려가 볼 수 있다. 자기 이해가 왜 필요한가. 기록은 왜 남겨야 하는가. 쓰는 게 왜 좋은가.


이 작업을 충분히 반복하면 어떤 지점에 도달한다. 더 이상 이유를 댈 수 없는 지점. 그 아래에는 "그냥 그렇다"가 있다. 어떤 철학적 구조물을 세우든, 그 구조물의 최하단에는 언어로 더 환원되지 않는 선택이 놓여 있다.


리벳의 실험이 밀리초 단위에서 보여준 것과, 삶의 긴 시간 단위에서 드러나는 이 구조는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유는 행동의 토대가 아니다. 행동 위에 얹힌 층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을 하는걸까


하나의 기능은 설명이다.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질문이 주어졌을 때 응답할 수단이 된다. 다른 기능은 검사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걸 한다"고 정의하는 순간, 그 행동은 행복을 실제로 산출하는지 주기적으로 점검받는 대상이 된다. 점검을 통과하지 못하면 멈춰야 할 근거가 생긴다.


이유를 붙이는 순간 그 이유가 흔들리면 행동도 같이 흔들린다. 이유는 지속의 조건이 되는 동시에 중단의 근거가 된다.


도파민과 쾌락을 행동의 이유로 삼는 경우가 이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도파민의 기준선은 계속 이동한다. 어제의 기쁨은 오늘의 평범함이 된다. 이유가 쾌락의 극대화라면, 이 이동은 행동을 끊임없이 재조정하게 만든다. 더 강한 자극을 향해, 더 새로운 쾌락을 향해. 그러나 기준선이 이동한 만큼의 기쁨은 좀처럼 따라오지 않는다. 이유가 행동을 견인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유가 행동을 끌고 다니며 소진시킨다.


"왜 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냥"이라는 대답은 회피가 아니라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지점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는 대답일지 모른다. 그 위에 어떤 언어도 덧붙이지 않겠다는 선택. 이 대답은 언어로 변환하거나 포장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은, 오히려 그 사람의 가장 순수한 영혼을 드러내는 표현일지 모른다.


점균류가 가던 길을 계속 가듯이, 리벳의 피험자의 뇌에서 의식보다 먼저 운동 준비 전위가 발생하듯이, 인간의 많은 행동도 언어 이전의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유는 그 운동의 원천이 아니라, 운동이 남긴 흔적 위에 후속해서 새겨지는 기록이다.



2.


지금까지의 논의는 자기 자신의 행동과 이유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이 관점을 그대로 타인에게 돌리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고방식 하나가 근본적으로 흔들린다. 타인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방식.


우리는 보통 이렇게 추론한다.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한다. 따라서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 꾸준히 봉사하는 사람은 이타적인 사람이고, 자주 화내는 사람은 분노가 많은 사람이고, 오래 한 분야를 파고드는 사람은 그 분야에 진심인 사람이다. 행동은 정체성의 표현이고, 정체성은 행동의 원천이다. 우리는 이 전제 위에서 타인을 읽는다.


그런데 행동의 뿌리가 언어 이전의 지점에 있고, 정체성이 그 행동을 사후에 정리하고 명명하는 언어 작업의 산물이라면, 이 전제는 유지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의 의도를 얼마나 파악할 수 있는가.



정체성은 어디서 만들어질까?


우리는 자신의 과거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패턴을 찾는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해왔다"는 관찰이 쌓이고, 거기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 작업은 본질적으로 언어적이다. 행동의 흐름 위에 서사를 덧씌우는 작업.


그런데 정작 그 행동들을 발생시킨 것은 언어 이전의 층위에 있다. 점균류의 운동처럼, 리벳 실험에서 의식보다 먼저 발생한 운동 준비 전위처럼. 정체성이라는 언어 산물과 행동을 만들어내는 전언어적 메커니즘은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자신을 "이타적"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그 사람이 실제로 이타적 행동을 지속적으로 산출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전자는 설명이고, 후자는 운동이다. 설명이 운동을 정확히 반영할 이유는 없다.


이 비대칭이 타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의 행동을 관찰한다. 나는 그 행동들로부터 그 사람의 정체성을 추론한다. 그 정체성으로부터 그 사람의 향후 행동과 의도를 예측한다. 이 과정에서 두 번의 간극이 발생한다.


첫 번째 간극. 내가 관찰한 행동은 그 사람의 전언어적 메커니즘이 산출한 표면이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낸 정체성은 그 메커니즘이 아니라 그 표면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심지어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가진 언어적 정체성조차 그 메커니즘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 외부에서 관찰한 내가 만든 정체성이 그보다 더 정확할 근거는 없다.


두 번째 간극. 내가 구성한 정체성으로부터 예측한 의도는, 실제로 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언어적 구조물의 논리적 연장이다.


두 번 모두 우리는 운동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운동의 표면 위에 자신의 언어를 얹고 있다.


그러니까 타인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존재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을 재료로 우리가 구성한 서사다. 그 서사는 유용하고, 때로는 그 사람 자신의 서사보다 더 통찰력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를 포착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사람은 저 행동을 지속한다"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규정은 관찰자의 언어적 구성물이며, 그 사람의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파악한 것은 타인 자체가 아니다. 타인의 행동이 남긴 궤적이고, 그 궤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타인 자체는 궤적 너머에, 언어 너머에 있다.



3.

타인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은 관계에 대한 비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구성한 정체성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면, 우리가 맺는 관계는 무엇 위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만나는가.


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선언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다." "나는 이것을 계속할 것이다." 이 선언은 1장에서 말한 전언어적 행동과 다르다. 언어로 스스로의 다음 행동에 조건을 거는 재귀적 운동이다. 스스로에게 내린 명령, 혹은 스스로에게 한 약속.


이 선언이 완벽하게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말과 행동은 자주 갈라진다. 선언의 언어 계층과 행동을 산출하는 전언어적 계층이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자기선언은 완벽한 예측 변수가 되지 못한다. 거기에는 늘 불확정적 여백이 남는다.


관계는 이 두 영역 위에 성립한다. 서로의 자기선언으로 예측 가능한 영역, 그리고 그 선언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불확정적 빈틈. 이 둘이 함께 있다.


만약 관계가 예측 가능한 영역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기계 장치에 가깝다. 역으로 불확정적 빈틈만 있다면 관계는 성립하지 못한다. 둘의 공존이 관계를 살아있게 만든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느낄 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이 공존이다. 예측 가능한 패턴이 만드는 신뢰감, 그리고 그 패턴을 벗어나는 순간들이 주는 놀라움. 그 놀라움이 우리의 인식을 갱신시킨다.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 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생기고, 그 차이가 관계를 다시 쓰게 만든다.


인간관계가 살아있다는 느낌은 정확한 이해에서 오지 않는다. 이해가 계속 미끄러지는 곳에서 온다. 완전한 투명성은 관계를 정지시킨다. 불투명성의 여백이 관계를 운동하게 만든다.



이 구조를 공동체 차원으로 확장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각자가 자신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전언어적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성립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들이 중첩되고 조정되면서 잠정적인 공유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 공유지를 구성하는 재료다.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충분히 작동하는 근사치. 이 근사치가 계속 갱신되며 공동체를 유지한다.


공동체는 이해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오해와 재해석의 지속적 순환 위에 세워진다.


이제 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와보자.


타인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떠한가. 1장에서 이미 한번 짚었듯, 나를 움직이는 것은 언어 이전의 층위에 있고, 내가 내 행동에 대해 가진 이해는 사후적 서사다. 이 구조는 타인에 대한 구조와 다르지 않다. 내가 나에 대해 가진 접근권은 타인에 대한 접근권보다 조금 더 가까울 뿐,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것이다.


"나는 나를 안다"는 말은 "나는 타인을 안다"는 말과 같은 방식으로 불완전하다. 나는 내 행동의 흔적을 관찰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서사를 만든다. 그 서사는 나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이 산출한 표면 위의 구성물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언어적 그림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그림은 늘 불완전하다. 자기 이해란 그 불완전함을 알고,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언어 너머에서 지켜보는 태도다. 이유로 환원하려 하지 않고, 정체성으로 고정하려 하지 않고, 운동하고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


여기서 1장의 "그냥"이 다른 무게로 되돌아온다. "그냥"은 자기 이해의 포기가 아니다. 자기 이해의 가장 정직한 형태다.



결국 남는 것은 운동이다.


이유도 정체성도 언어의 구성물이다. 그 아래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움직임. 점균류가 길을 가듯이, 피험자의 뇌에서 의식보다 먼저 준비 전위가 발생하듯이,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무언가를 계속하듯이.


언어가 이 운동을 따라잡으려 한다. 그러나 늘 한 발 늦는다. 그 간극이 우리가 사는 공간이다.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운동과, 그 위에 끊임없이 얹히는 언어 사이의 간극. 우리는 그 사이에서 자신을 살고 타인과 만난다.

운동이 먼저 있다. 그 다음에 언어가, 그 다음에 이유가 온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순서를 뒤집어 믿는 것이고, 동시에 그 믿음이 무너질 때마다 운동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진: UnsplashJean-Philippe Delberg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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