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드는 '세상'
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그는 평생 거리의 병자들을 돌보았고, 자신의 월급을 털어 약값을 대었으며, 잠잘 곳이 없어 병원 한 켠에서 생을 마쳤다. 그에게는 전쟁 중 헤어진 가족이 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세상은 그를 성자라 불렀다.
또 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그의 이름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아이의 도시락을 쌌고, 피곤한 몸을 끌고 일터로 나갔으며, 밤이 되면 아픈 부모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그의 세계는 집과 직장 사이의 좁은 길 위에 있었다. 세상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누가 더 옳은 삶을 살았는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많은 이들은 첫 번째 사람에게 먼저 마음이 기울 것이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구했고, 더 큰 사랑을 실천했고, 개인의 안위를 넘어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 번째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추상적인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 앞의 한 사람을 평생 책임지는 일이야말로 더 어렵고 더 구체적인 사랑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반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느 쪽도 질문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비교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 비교를 가능케 하는 공통의 잣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더 큰 사랑이냐 더 구체적인 사랑이냐, 더 넓은 책임이냐 더 깊은 책임이냐 — 이 모든 비교는 두 삶이 같은 좌표계 위에 놓여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 정말 그런 좌표계가 있는가.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저 그런 기준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뿐인가.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세상을 위해 가족을 등진 사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등진 사람은, 어쩌면 서로 다른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들은 둘 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했다. 다만 그 '무언가'를 어디에 두었느냐가 달랐을 뿐이다. 한 사람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테두리를 인류의 크기로 넓혔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테두리를 가족의 크기로 조였다.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것을 지키기 위해, 각자 테두리 바깥에 남겨진 것을 놓아버렸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리에 선을 그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비교하려 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어놓은 선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옳은지를 판단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판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을 비교하려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둘 중 한쪽의 선 위에 서 있게 된다. 첫 번째 사람을 더 숭고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넓은 경계 쪽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의 무게를 더 무겁게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좁은 경계 쪽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도 아닌 중립 지대에 서서 둘을 공정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과연 그럴까. 중립이라는 위치도 결국 누군가가 서 있는 자리가 아닌가.
그래서 이 글이 던지고 싶은 첫 번째 의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가치관으로 두 삶을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이미 그어놓은 어떤 선이 우리의 판단을 미리 만들어놓은 것인가.
이 의심을 조금 더 밀어보자.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먼저 나의 신념이 있고, 그 신념에 따라 나의 선택이 결정된다고.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약 순서가 반대라면 어떨까. 내가 먼저 어떤 방향으로 발을 디뎠고, 그 걸음을 계속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그 걸음을 설명해 줄 이야기가 내 안에 자라난 것이라면. 내가 '나의 가치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내가 이미 걸어온 길에 나중에 붙인 이름'이라면.
이 가능성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가치관이라는 것을 얼마나 당연하게 '원인의 자리'에 놓아왔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가치관이 먼저 있고 행동이 따라온다는 이야기를 의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신념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확고한 삶의 방향을 가질 수 있는가. 반대로 수많은 사상과 윤리를 공부한 사람들이 왜 정작 자기 삶의 방향 앞에서는 망설이는가. 신념이 행동을 낳는다는 설명은 이런 장면들 앞에서 오히려 무력하다.
그래서 한 번 뒤집어 보자는 것이다. 만약 행동이 먼저 있고, 그 행동이 반복되어 길이 되고, 그 길이 자기를 설명할 언어를 나중에 불러들이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나의 신념'이라고 믿어온 것들은 사실 우리가 이미 딛고 서 있는 어떤 경계선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 경계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치관의 언어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세상을 위해 가족을 등진 사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등진 사람은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들이 다른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 그들은 다른 경계 위에 서 있었고, 그 경계가 각자의 가치관을 자라나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가치관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경계가 다른 가치관을 낳은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그 경계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그어놓은 것인가.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어딘가에서 그어져 있었던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결과'라고 설명해 온 방식은 어디까지 믿을 만한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처음 발을 떼는 순간부터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가장 처음의 걸음.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때, 왜인지도 모르면서 어느 쪽으로 몸이 기울었던 그 순간. 거기서부터 경계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시작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낯선 도시로 이주하는 첫날, 처음으로 아픈 이의 손을 잡던 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향해 기차에 오르는 아침.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물어보자. 만약 그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그는 과연 그 일을 시작했을까.
정확히 안다는 것은 무엇을 포함하는가. 앞으로 겪게 될 고생의 총량을, 치러야 할 비용의 크기를, 포기해야 할 것들의 무게를 미리 계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미리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발을 뗄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우리가 삶에서 의미 있다고 부르는 거의 모든 시작은 이상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잘 알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끝을 보지 못한 채 발을 뗀다. 새로운 일을 벌일 때 우리는 그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 채 손을 뻗는다. 누군가를 책임지기로 결심할 때 우리는 그 책임의 무게를 미리 달아보지 않는다. 만약 달아보았다면 결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의미 있는 시작에는 계산이 닿지 않는 어떤 지점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발을 떼는가.
기댈 곳이 없이, 그냥 뗀다. 이것을 도약이라 부를 수 있겠다. 도약은 앎 위에서 이루어지는 실행이 아니다. 도약은 앎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행위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조금 다르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가 평생 반복해 온 작은 선택들을 떠올려 보자. 낯선 가게의 문을 처음 밀고 들어서는 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일, 이전에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는 일. 이 작은 행위들에도 '잘 모르는 채로 발을 떼는' 순간이 숨어 있지 않은가. 다만 그 규모가 작아서 우리는 그것을 도약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도약은 특별한 영웅의 일이 아니라, 매일 우리가 하고 있지만 잘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만약 도약이 그렇게 흔한 일이라면, 왜 어떤 사람의 도약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꾸고, 어떤 사람의 도약은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끝나는가. 같은 구조의 행위가 왜 어떤 경우에는 정체성을 만들고 어떤 경우에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가.
답은 도약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도약 다음에 오는 것에 있다.
한 번의 도약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 한 번 가보는 일이 한 사람을 이주민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한 번의 선의가 그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도약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난다면, 그것은 지나가고 잊힌다. 도약이 무언가가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반복이다. 다음 날에도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떼는 일. 그 다음 날에도. 한 달 뒤에도. 일 년 뒤에도. 이 반복이 쌓일 때 비로소 하나의 경로가 생긴다.
경로는 도약과 성격이 다르다. 도약이 앎 없이 이루어지는 한순간의 실행이라면, 경로는 그 실행이 시간 속에서 반복되며 만들어지는 구조다. 그런데 반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같은 방향으로 매일 발을 떼는 일이 고통뿐이라면 사람은 곧 멈춘다. 반복이 지속되려면 그것을 지탱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피곤한 몸을 다음 날에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어떤 힘.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대개 이렇게 답한다. 가치관에서 온다고. 신념에서 온다고. 그 사람이 그 일을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반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설명은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한 가지 이상한 지점이 있다. 그 가치관은 대체 언제부터 그의 안에 있었는가.
첫 도약의 순간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잘 모르는 채로 발을 떼었다.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는 이 반복을 지탱할 가치관이 아직 없었다. 가치관이 행동의 이유였다면,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도약의 본성이 '모르는 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순간의 그에게는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저 움직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치관은 언제 등장하는가. 같은 방향으로 열 번, 백 번 발을 뗀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반복이 쌓이는 동안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왜 이것을 계속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면 반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답을 찾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답을 만든다. 자신의 반복에 의미를 부여할 언어를 찾아내고, 그 언어로 자기 행위를 설명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설명이 굳어져 '나의 신념'이 된다.
이것이 가치관이 태어나는 자리다. 가치관은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행동이 반복될 수 있도록 나중에 조립된 구조물이다. 우리는 먼저 신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산 것이 아니다. 먼저 움직였고, 그 움직임을 지속하기 위해 그것을 설명해 줄 이야기를 나중에 필요로 했을 뿐이다.
이 순서가 정말로 맞는지, 한 번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당신이 지금 가장 확고하게 믿고 있는 신념 하나를 떠올려 보자. 그 신념은 언제부터 당신 안에 있었는가. 어느 날 갑자기 책에서 읽어서 형성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어떤 방향으로 살아오고 있었고 그 삶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찾아온 것인가. 정직하게 돌아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두 번째가 더 가깝다. 우리는 이미 살고 있었고, 그 살아온 방식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신념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물을 수 있다. 만약 가치관이 행동의 부산물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흔히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마치 그 답이 이미 내 안에 숨겨져 있고, 충분히 들여다보면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런데 만약 답이 내면에 없다면. 답이 내가 이미 걸어온 길 위에 있다면.
이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그가 무엇을 반복해 왔는가가 더 정확한 자기 이해의 재료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로는 얼마든지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반복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은 시간이라는 증인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반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왜 어떤 사람은 이 방향으로, 또 어떤 사람은 저 방향으로 발을 떼게 되는가. 첫 도약에는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유가 없다고 해서 방향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약은 아무 데로나 일어나지 않는다. 도약은 언제나 어떤 쪽을 향해 일어난다. 그 방향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이 글의 핵심에 가깝다.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발을 뗄 수 있었던 것은, 그 방향에 있는 무언가를 이미 자기 자신의 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기 바깥의 완전한 타인이었다면 발을 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자기와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면 반복할 동기도 없었다. 도약이 어떤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순간 이미 그에게 어떤 경계가 그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 경계 안쪽으로 무언가가 들어와 있었고, 그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혹은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이 경계는 언제 그어졌는가. 그는 그것을 선택한 기억이 없다. 도약의 순간에 "나는 이것을 내 안에 포함시키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다. 그저 발을 뗐을 뿐이다. 그렇다면 경계는 그가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어딘가에서 그어져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미리 그어진 경계가 그의 도약의 방향을 결정했고, 그 도약의 반복이 경로가 되었으며, 그 경로가 마침내 그의 가치관을 자라나게 했다.
이 순서를 다시 정리해 보자. 한번 천천히 따라가 보자는 뜻이다. 먼저 경계가 있었다. 그 경계는 누가 그었는지 모른다. 그 다음 그 경계를 따라 도약이 일어났다. 도약은 모르는 채로 이루어졌다. 그 다음 도약이 반복되어 경로가 되었다. 경로가 굳어졌을 때 비로소 가치관이 태어났다. 가치관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가 평생 '나의 신념'이라고 불러온 것이, 사실은 우리가 이미 걸어온 길을 뒤늦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기 이전에, 자기 이해의 근본적인 뒤집힘이다. 그런데 이 뒤집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 가지가 영영 설명되지 않는다.
이 순서가 사실이라면,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그의 신념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가치관도 아니다. 그를 규정하는 것은 그가 어떤 경계 위에 서 있었는가이다. 그리고 그 경계가 무엇을 자기 안에 포함시키고 무엇을 바깥에 두었는가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질문이 남는다. 사람들은 왜 서로 다른 자리에 경계를 긋는가. 어떤 이는 왜 자기 자신 너머 먼 곳까지 경계를 밀어내고, 또 어떤 이는 왜 가장 가까운 몇 사람의 주위에 경계를 단단히 묶는가. 이 두 종류의 경계는 각각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이 두 세계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여기서부터 살펴볼 두 세계는 순수한 형태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두 개의 대표적 지점이다. 아니 두 지점이 모든 지점들을 대표할 권한은 없다. 다만 두 지점을 비교함으로서 스펙트럼을 이해해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두 지점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도 드물다. 우리 대부분은 하루 안에서도 여러 경계 위를 오가며 살아간다. 아침에는 가족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다가, 출근길에 뉴스를 보며 잠시 더 먼 곳의 고통에 마음이 흔들리고, 직장에서는 동료라는 또 다른 경계 안에 놓였다가, 저녁에는 다시 가장 가까운 이들 곁으로 돌아온다. 이 이동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계산한 결과가 아니다. 하루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 두 지점을 먼저 살펴보려 하는가. 현실은 이렇게 뒤섞여 있는데, 두 지점을 따로 다루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한 가지 비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 위에 어떤 장소를 표시하려 할 때 우리는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 가로축과 세로축. 그 두 축 자체는 현실의 어떤 장소도 아니다. 축은 장소가 아니라 좌표다. 축이 없으면 우리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말할 방법이 없다. 반대로 축이 있으면, 실제 장소가 두 축 사이 어디에 있든 그 위치를 가리킬 수 있다.
두 지점을 먼저 다룬다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중첩의 세계와 집약의 세계는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살아내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말하기 위한 두 개의 축이다. 축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자기가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도 읽어낼 수 없다. 두 지점을 본다는 것은 현실을 단순화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복잡함을 읽어낼 좌표를 세우는 일이다.
첫 번째 세계에 사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의 경계는 처음에는 자신과 가족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경계가 바깥으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웃이 들어오고, 직장의 동료들이 들어오고, 같은 도시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마침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까지 그의 경계 안쪽으로 들어온다.
이 사람을 설명할 때 흔히 '넓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표현이 정확한가. 한번 의심해 보자.
'넓다'는 말은 어딘가 평평하게 펼쳐진 것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손바닥을 넓게 펴듯이, 경계가 수평으로 확장되는 이미지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한 사람이 국가라는 경계를 자기 것으로 끌어안았다고 해보자. 그 국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수많은 가족들, 수많은 직장들, 수많은 공동체들, 수많은 개인들이 들어 있다. 그가 국가를 품었다는 말은, 그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하위 경계들을 동시에 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계가 바깥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평평하게 펼쳐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 안에 점점 더 많은 경계들이 포개지는 일이다. 수평 확장이 아니라 층층이 쌓이는 중첩이다. 국가 안에 도시가 있고, 도시 안에 공동체가 있고, 공동체 안에 가족이 있고, 가족 안에 개인이 있다. 이 모든 층위가 한 사람의 경계 안에 함께 들어와 있다면, 그의 경험은 무엇과 비슷할 것인가.
아마 쉬지 않는 긴장과 비슷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층위들은 서로 깔끔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공동체에 좋은 일이 다른 공동체에는 나쁠 수 있다. 한 제도가 누군가를 구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층위를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그저 남의 일로 밀어낼 수 없다. 각 층위의 요구가 서로 부딪힐 때, 그는 그 부딪힘을 자기 자신 안에서 느낀다.
그래서 이 세계의 본질을 한 단어로 말해야 한다면, '넓이'보다는 '중첩'이 정확하지 않을까.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 감당하는 것은 멀리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의 경계들이 자기 안에서 동시에 울리며 만들어내는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다. 이 긴장을 어느 하나로 단순화하지 않고 품어내는 것. 이것이 그의 일상이다.
이 대목에서 실제 한 사람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한국에 장기려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전쟁 중 북에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홀로 남하했고,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남한에서 그는 거리의 병자들에게 자신의 월급과 시간을 쏟았다. 병원 뒷문으로 가난한 환자를 몰래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장기려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개인적 선의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개별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한계를 넘기 위해 한 달에 육십 원씩 내는 사람들을 모아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다.
이 행위를 잘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그는 '지금 내 앞의 환자'를 돌보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까지 자기 경계 안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그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개인의 선의를 넘어서 제도적 상상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 세계의 사람이 왜 제도를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여기 있다. 중첩된 경계들을 감당하려면, 그는 자기 한 몸으로는 그 무게를 다 짊어질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구조를 짓는다. 자기가 사라진 뒤에도 그 경계들이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성직자가 독신을 택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경계를 제도적으로 비워 둠으로써, 그 빈자리에 얼굴 모르는 타인들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주민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답해질까. 아마 이렇게 답해질 것이다. 나는 한 아이의 부모이면서 동시에 한 직장의 구성원이고, 한 공동체의 시민이며, 한 시대의 동시대인이다. 이 모든 층위의 요구가 내 안에서 충돌할 때, 어느 하나를 쉽게 버리지 않고 그 긴장을 함께 살아내는 자. 그것이 나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의 경계는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의 선이 굵고 뚜렷하게 그어진다. 그 선 안쪽에는 몇 사람이 있다. 배우자, 아이, 부모, 오래된 친구 몇 명. 그리고 그 선 바깥에는 나머지 세계 전부가 있다.
이 사람을 설명할 때 흔히 '좁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표현도 의심해 볼 만하지 않은가.
'좁다'는 말은 결핍을 암시한다. 더 넓을 수 있었는데 그만큼 가지 못한 것 같은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로 결핍된 사람인가. 그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구체적인 한 사람에게 온전히 응답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그것은 그의 어제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의 오늘 아침의 표정을 읽어내는 일이고, 그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듣는 일이다. 그가 아플 때 곁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며, 그가 실패했을 때 그를 비난하지 않고 함께 무너져 주는 일이다. 그가 죽음에 가까워질 때 그 손을 놓지 않는 일이고, 그가 떠난 뒤 오랫동안 그를 기억하는 일이다.
이 목록을 보면서 물어보자. 이 일들을 '좁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인류를 향한 추상적 사랑보다 쉬운 일인가. 솔직히 생각해 보면 그 반대에 가깝다. 추상적 사랑은 비용이 적게 든다.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는 데에는 매일 지불해야 할 대가가 없다. 비용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다. 매일 같은 밥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짜증을,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의 실망을, 내 가장 가까운 이의 실패와 무기력을 — 이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내는 일이야말로 진짜 대가가 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본질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좁이'가 아니라 '밀도'가 더 맞지 않을까. 경계 안에 들어온 존재의 수는 적지만, 그들 각각에게 쏟아지는 에너지의 농도는 다른 세계와 비교할 수 없다. 수량이 적다는 것과 집약이 약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여기서 한 가지 미리 짚어둘 점이 있다.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 경계 안에 두는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어떤 이는 부모와 형제를, 어떤 이는 오래된 친구 몇 명을 경계 안에 둔다. 그리고 그 범위는 더 좁아질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오직 자기 자신만 경계 안에 두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들 모두가 집약이라는 하나의 방향 위에 서 있다. 중요한 것은 경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있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온 존재에게 자기 존재 전체를 걸고 응답한다는 집약의 방식 그 자체, 자기 존재를 경계 안쪽에 건다는 행위 그 자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집약의 세계'는 가족에 헌신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를 자기 가까이에 단단히 묶고 그 안의 것에 자기 전부를 건 사람들의 세계다. 이 범위 안에는 놀랍도록 다양한 얼굴이 들어간다.
이 세계에는 한 가지 더 눈여겨볼 특징이 있다. 경계 안에 구체적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 이상한 종류의 용기를 준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의 바깥에 있고, 그 대상이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에게 자기 목숨은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내가 사라져도 이어졌으면 하는 무언가가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경계 안에 구체적 타인이 있을 때에만 생긴다. 반대로 경계 안이 비어 있는 사람, 즉 자기 바깥에 사랑하는 구체적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세계는 자기 존재의 연장선일 뿐이다. 자기가 위협받는 순간, 그에게는 세계 전체가 함께 무너져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패배한 상태로 남은 세계를 허용하느니, 모두가 함께 끝나는 편이 낫다. 이것이 경계 안이 텅 빈 사람의 내면 논리다.
그런데 경계 안에 구체적 사랑이 있는 사람은 이 논리를 따를 수 없다. 그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 사랑은 살아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세계를 함께 끌고 가지 않는다. 자기 안이 텅 비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굴하지 않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좁아 보이는 경계가 가장 넓은 경계(세계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뜻이다. 이 역설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닥쳤을 때 비로소 모습을 보인다.
이 세계의 주민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답해질까. 아마 이렇게 답해질 것이다. 나는 세계를 바꿀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한 사람의 하루는 내가 책임질 수 있다. 이 한 사람의 실패를 내가 받아낼 수 있다. 이 한 사람의 죽음을 내가 배웅할 수 있다. 그것이 나다.
여기까지 와서 한 가지 물어보자.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더 옳은가.
아마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 답하기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한번 들여다보자. 만약 두 세계가 같은 기준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한쪽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더 넓은 사랑인지 더 깊은 사랑인지, 더 많은 사람인지 더 가까운 사람인지 — 무엇이든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답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망설이는 것은, 그 기준 자체가 각 세계 안에서 다르게 자라나 있다는 직감 때문 아닌가.
중첩의 세계 안에서 자라난 사람은 '더 많은 층위를 감당하는 것'을 선이라고 느낄 것이다. 집약의 세계 안에서 자라난 사람은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끝까지 응답하는 것'을 선이라고 느낄 것이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개념은 그들이 이미 선 경계에서 자라났다.
그렇다면 이 두 세계는 단지 사이좋게 공존할 뿐인가. 그렇지 않다. 두 세계가 같은 방 안에 놓이는 순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게 된다. 각자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는 자신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무언가로 변해 버린다. 그 번역 불가능성은 단순한 불편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두 사람을 정반대의 선택으로 몰고 간다.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그리고 그때 두 세계는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게 되는가.
두 세계가 서로를 바라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인 장면으로 그려보자.
중첩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집약의 세계를 본다. 그의 눈에는 무엇이 들어오는가. 한 사람이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밤을 새우면서도, 바로 옆 동네에서 벌어지는 고통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장면이 보인다. 자기 울타리 안의 한 사람이 아플 때는 온 에너지를 쏟으면서도, 그 울타리 바깥의 수많은 고통에는 거의 무관심한 듯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느낄까. 아마 이렇게 느낄 것이다. 저 사람은 상상력이 부족하다. 자기 울타리 너머에 있는 존재를 자기처럼 느끼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세상에는 고통받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어떻게 자기 반경 안의 몇 사람에게만 그토록 많은 것을 쏟을 수 있는가. 그 에너지의 일부만이라도 바깥으로 돌렸다면 구할 수 있었을 생명들이 있을 텐데.
이번에는 반대편을 보자. 집약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중첩의 세계를 본다. 그의 눈에는 무엇이 들어오는가. 한 사람이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 아이의 생일을 잊어버리는 장면이 보인다. 한 사람이 먼 곳의 고통을 이야기하느라 바로 옆에 앉은 배우자의 피곤한 얼굴을 읽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느낄까. 아마 이렇게 느낄 것이다. 저 사람은 가장 쉬운 사랑을 하고 있다.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는 일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얼굴 없는 다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진짜 사랑은 매일 같은 밥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짜증을 받아내는 일이고, 그 비용은 오직 가까운 곳에서만 발생하는데, 저 사람은 그 비용을 지불한 적이 없다.
여기서 한번 물어보자. 이 두 비난 중 어느 쪽이 옳은가.
흥미롭게도, 두 비난이 모두 옳다. 중첩의 세계에서 보기에 집약의 세계는 정말로 시야가 좁다. 집약의 세계에서 보기에 중첩의 세계는 정말로 가장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한다. 각자가 상대를 비난하는 내용은 관찰로서는 정확하다. 그러면 두 비난이 모두 옳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두 세계 모두 결함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두 세계 모두 나름대로 괜찮다는 뜻인가.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관찰을 했다고 해도, 그 관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는 서로 다르다. 중첩의 세계 사람에게 '시야가 좁다'는 말은 곧 '도덕적 결함이 있다'와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층위를 감당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집약의 세계 사람에게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한다'는 말은 곧 '사랑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와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에서는 가장 구체적인 존재에게 끝까지 응답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같은 관찰이 서로 다른 선의 좌표계 안에서 해석되기 때문에, 같은 사실이 서로에게 정반대의 도덕적 무게를 가진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두 세계 사이에 공통의 좌표계는 존재하는가. 두 사람이 서로의 관찰을 같은 무게로 평가할 수 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지점은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려 보자. 두 세계가 단지 평화롭게 서로 불편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말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의 선택은 두 세계가 얼마나 다른 좌표계 위에 서 있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런 순간 중 하나가 역사에 실제로 있었다. 1962년 10월, 쿠바 해역에서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의 문턱까지 다가갔던 열흘 동안이다. 두 국가의 지도자는 각각 수백만, 아니 수억의 목숨을 한 번의 결정으로 앗아갈 수 있는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다. 세계는 살아남았다.
만약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기 바깥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결과가 같았을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따라가 보자. 자기 바깥에 사랑하는 구체적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세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에게 세계는 자기 존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계와 자기 목숨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세계가 자기에게 호의적일 때 세계는 가치가 있고, 세계가 자기를 위협할 때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것은 경계가 자기 자신에만 그어져 있는 존재가 도달하는 완벽하게 일관된 결론이다. 그에게 자기 죽음과 세계의 죽음은 결코 다르지 않다. 둘 다 그의 세계관이 끝난다는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1]
그의 경계가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의 문제일 뿐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경계가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에는 외부의 절대 기준이 없다. 어떤 사람의 경계가 자기 자신에만 그어져 있다면, 그 경계 안에서 그의 선택은 가족이 있는 사람이 가족을 지키는 선택만큼이나 일관되고 진실하다.
이 지점에서 많은 독자는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럼 이기주의자도 정당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 불편함 자체가 우리가 어떤 경계 위에 서서 판단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지금 인류의 생존이라는 훨씬 넓은 경계 위에 서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그 경계에서 보면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수억을 파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율이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의 경계에서 보면 그것은 자기 자신 전체 대 자기 자신 전체의 교환일 뿐이다. 같은 사건이 어느 경계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우리의 불편함은 그 사람이 악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경계와 우리의 경계가 만나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세계가 살아남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지도자가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을 '선한 선택'이라 부르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경계 안에 자기 바깥의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자녀가 있었고, 책임져야 할 수억의 시민이 있었으며, 자기가 대표하는 제도와 역사가 있었다. 그들의 경계가 자기 자신을 넘어선 지점에 그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의 위협이 곧바로 세계의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경계 안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들의 손가락을 무겁게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드러난다. 인류 전체의 생존이라는 가장 넓은 경계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경계가 자기 자신을 넘어섰는지 아닌지라는 작은 조건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인류를 구한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인류는 그저 누군가가 자기 바깥에 무언가를 사랑했다는 우연한 사실 덕분에 살아남았다. 만약 그 자리에 경계가 자기 자신에만 그어진 사람이 앉아 있었다면, 인류의 생존은 그 한 사람의 일관된 세계관 앞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불편한 직감을 남긴다. 우리가 평소 '선한 힘'이라고 부르는 것들 — 누군가가 세계를 파괴하지 않기로 한 선택, 누군가가 자기 이익보다 더 큰 것을 지킨 결정 — 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보편적 도덕률의 작동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 멀리 간 해석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우연'이라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한순간에 그 선택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떤 방향으로 반복해서 발을 떼어왔고, 그 반복이 그들의 경계를 만들었고, 그 경계가 결정적 순간에 그들의 손을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쌓아 올린 경로가 결정의 순간에 작동하는 일이다. 그 경로가 '선한 방향'이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 방향이 외부의 어떤 도덕률에 의해 보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람의 반복이 어떤 경계를 지탱하는 방향으로 쌓여왔고, 그 경계가 우리 자신의 경계와 우연히 겹쳤기 때문이다. 선한 순간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우연을 넘어, 반복이 만든 구조가 경계 설정의 방향과 만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드러남을 우리가 '선하다'고 느끼는지 여부는, 우리가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지에 달려 있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이 글은 지금까지 두 세계를 '공정하게' 서술하려고 노력해 왔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고, 각 세계의 내부 논리를 그 자체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이 '공정함'이라는 태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위치다. 두 세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 태도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위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위치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이 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두 세계를 비교 가능한 것으로 다루려는 이 시도 자체가 하나의 경계 설정이다. 어쩌면 이 글은 두 세계 중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채, 그 사이의 중첩성을 이해하려는 또 다른 경계 위에서 쓰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 편이 정직하다. 이 글은 바깥에서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자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글 역시 어떤 자리 위에서 쓰이고 있다. 다만 그 자리가 어느 하나의 순수한 극단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순수하지 않음' 자체가 이 글이 기대고 있는 조건이라는 것만큼은 밝혀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두 세계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 결론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단순히 "모두 각자 다르니 서로 건드리지 말자"는 상대주의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이 결론은 우리를 더 깊은 질문으로 밀어넣는다.
두 세계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들 사이에 중립 지점이 없다면,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느 경계에도 속하지 않는 보편적 실체인가. 아니면 —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느 경계 위에 서 있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해보려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까지 내려가 봐야 한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너무 오래되고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일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먼저 가장 기초적인 사실 하나에서 시작해 보자.
인간은 파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도덕적 주장이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이다. 우리가 오늘 먹은 한 끼의 식사에는 죽음이 들어 있다. 쌀알 하나도 한때는 살아 있었고, 잎사귀 한 장도 한때는 빛을 향해 몸을 펼쳤다. 우리가 그 생명들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이어진다. 이것은 누구의 선택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생명을 소모하면서만 지속될 수 있도록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상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우리가 '파괴하지 않는 것이 선이고 파괴하는 것이 악이다'라는 기준을 정말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악이 되지 않는가. 숨 쉬는 일조차 공기 중의 미생물들에게는 재앙이다. 그런데 누구도 자기 존재를 그런 식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파괴하면서도 스스로를 악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런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실제로 적용하고 있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괴하느냐 아니냐'를 묻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느 쪽의 파괴냐'를 묻고 있다. 식탁 위의 쌀알은 내 경계 바깥에 있고, 내 아이는 내 경계 안쪽에 있다. 그래서 쌀알의 죽음은 일상이고, 아이의 죽음은 비극이다. 둘 다 생명의 소멸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사건인데,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왜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가. 그 생명들이 우리 경계의 서로 다른 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수 있다. 우리가 '악하다'고 부르는 행위들을 한번 떠올려 보자. 누군가를 속이는 일, 누군가를 해치는 일,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일. 이 행위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잘 들여다보면, 이 행위들은 모두 어떤 경계를 위해 다른 경계를 파괴하고 있다. 속이는 자는 자기 이익이라는 경계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신뢰라는 경계를 파괴한다. 해치는 자는 자기 목적이라는 경계를 위해 타인의 안전이라는 경계를 파괴한다. 망가뜨리는 자는 자기 욕망이라는 경계를 위해 타인의 삶이라는 경계를 파괴한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자. '선하다'고 부르는 행위들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거리의 병자를 돌보기 위해 자기 월급과 시간을 포기하는 의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자기가 이미 확장해 둔 경계 — 거리의 병자들까지 포함한 경계 — 를 지키기 위해, 가장 안쪽의 경계인 자기 육체의 안녕을 파괴하고 있다. 그가 밤을 새우며 병자를 돌볼 때, 그는 자기 몸을 갈아 넣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키기로 한 것을 위해 자기가 포기하기로 한 것을 지불하고 있다.
이 구조를 속이는 자의 구조와 나란히 놓아 보자. 속이는 자는 자기 이익이라는 경계를 위해 타인의 신뢰라는 경계를 파괴한다. 선한 의사는 병자들이라는 경계를 위해 자기 육체라는 경계를 파괴한다. 둘 다 어떤 경계를 위해 다른 경계를 파괴한다. 행위의 구조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한쪽은 악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선이라 부르는가. 두 행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조금 정리해 볼 수 있다. 차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가능성이다.
먼저 방향을 살펴보자. 파괴가 공동체의 바깥을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대체로 허용한다. 사냥은 허용되지만 살인은 금지된다. 전쟁 상대국의 병사를 죽이는 일은 훈장의 대상이지만 자국 시민을 죽이는 일은 처벌의 대상이다. 여기에는 어떤 도덕의 절대 기준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행위가 방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가 경계를 어디에 그었는가이다.
이렇게 말하면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이 관찰이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평소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공동체적 합의에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직한 인정이다. 한 공동체가 자기 경계를 어디에 긋느냐에 따라, 그 안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선악의 좌표계가 결정된다. 다른 경계를 가진 공동체가 그 좌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다른 경계 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향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만약 방향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공동체의 바깥을 향하는 어떤 파괴도 모두 허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한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숲을 태우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대기를 망가뜨리는 일 앞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거부감, 불편함, 때로는 분노. 그런데 엄격히 따지면 환경은 우리 공동체의 '바깥'이다. 우리가 평소 경계 안쪽에 두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 파괴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
한번 물어보자. 우리가 환경 파괴에 불편함을 느낄 때, 그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숲 자체가 소중해서인가, 아니면 숲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는 감각 때문인가. 솔직히 돌이켜 보면, 후자에 더 가깝다. 우리는 환경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숲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지고, 바다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환경은 우리 경계의 바깥에 있는 동시에, 우리 경계의 성립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 경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바깥의 환경과 계속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환경을 지나치게 빠르게 파괴하는 일은 결국 자기 경계의 성립 조건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기준은 외부에서 수입된 기준이 아니다. 어떤 초월적 도덕률이 우리에게 "환경을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리 경계의 안쪽에 내재해 있다. 우리 경계는 처음부터 환경과 맞닿아 있었고, 그 맞닿음을 유지할 수 있는 속도로만 우리 경계가 지속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은 경계의 바깥에서 날아든 규범이 아니라, 경계 자체의 성립 조건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실질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어떤 경계를 중심에 두고, 파괴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며, 그 흐름이 경계의 성립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속도로 일어나는가. 이 세 가지가 함께 고려될 때 우리는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하거나 악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경계 바깥의 절대 기준'에서 오지 않는다. 세 요소 모두 경계 그 자체 안에서 작동하는 내재적 조건들이다.
여기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두 세계 — 중첩된 경계를 감당하는 세계와 집약된 경계를 지키는 세계 — 중 어느 쪽이 더 선한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이 왜 답할 수 없는 질문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선의 기준 자체가 경계 설정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중첩의 세계 안에서는 중첩의 기준에 따라 선이 정의되고, 집약의 세계 안에서는 집약의 기준에 따라 선이 정의된다. 두 세계를 함께 평가할 수 있는 바깥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준이 이미 어떤 경계 안쪽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결론이 우리를 허무주의로 데려가는가. 모든 것이 경계의 함수라면, 어떤 행위도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고 어떤 행위도 절대적으로 악하지 않다면, 결국 '무엇이든 괜찮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한번 이 의심을 끝까지 따라가 보자.
만약 절대 기준이 있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훨씬 단순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기준을 알아내기만 하면 되었을 테고, 그 다음에는 그 기준에 따라 살면 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무게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기준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단지 기준 없이 헤매는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정반대인가. 기준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긋는 경계가 단지 미리 주어진 선을 실천하는 일이 아니라, 그 선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이 정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디에 경계를 긋느냐에 따라 우리의 선악 좌표계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우리의 윤리를 만든다.
이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절대 기준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기준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기준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준이 우리의 경계 설정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 기준에 대한 책임까지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뜻이다. 어디에도 떠넘길 수 없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허무가 아니다. 이것은 가장 무거운 종류의 자유다.
이 자유는 어떻게 행사되는가. 앞서 우리는 첫 도약이 모르는 채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경계 설정도 맨 처음에는 무의식적인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경계를 긋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발을 뗀다. 그런데 그 도약이 반복되어 경로가 되고, 경로가 굳어져 세계가 만들어진 뒤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경계를 그었는지를 뒤늦게 알아본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아, 내가 여기에 선을 긋고 있었구나"를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의 순간부터, 경계는 더 이상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일단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본 사람에게, 그 다음의 걸음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알고 계속 걸을 것인가, 알고 멈출 것인가, 알고 방향을 바꿀 것인가 — 이것이 의식적 선택이 개입하는 자리다. 2장에서 말한 '도약'과 5장에서 말하는 '무거운 책임'은 같은 경계의 두 시기다. 경계가 처음 그어질 때는 모르는 채였지만, 그 경계가 자기 삶을 만들어낸 뒤에는 그 경계를 계속 지을 것인지 아닌지가 온전히 자기 몫이 된다.
그래서 한 가지 오래된 진화의 사실을 여기 놓아 볼 수 있다. 집단의 경로 탐색에서 개체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야 집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가장 안쪽의 경계를 기꺼이 파괴하면서까지 더 큰 경계를 지키려 한다면, 그는 자기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진짜 경계를 그었는지를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경계는 자기 육체에 있지 않았다. 육체 너머의 무언가에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가 그의 세계를 규정했고, 그 세계 안에서 그의 선택은 완벽하게 일관된다.
이것은 집약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한 사람이 자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그 역시 자기 경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그의 경계는 세상 전체에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 한 사람 주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 안에서 그의 선택은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일관된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선한가. 이 질문은 이제 우리에게 다른 질문처럼 들린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경계 위에서 각자의 선을 살아낸 것이고, 그 두 선은 같은 좌표계 안에서 비교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자기가 그어놓은 경계를 끝까지 살아냈다. 그 일관성이야말로,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을 '진실했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다.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반복으로 지탱하고, 그 지탱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세계의 선악 좌표계 안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이것이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일 중 하나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렇다면 이제 이 긴 이야기가 우리 각자에게 돌려주는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저 두 순수한 세계 중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경계 위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모든 이야기는 무엇을 묻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따라왔다면 한 가지 이상한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글은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더 옳은지 가려주지 않았고, 선과 악을 가려낼 보편적 기준을 내놓지도 않았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처방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 대신 글은 계속해서 한 가지 사실을 마주하게 했다. 모든 판단은 이미 어떤 경계 위에서 내려진다는 것. 그리고 그 경계는 우리가 선택했다고 의식하기도 전에 언어화 되기 전에 이미 그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 자리가 불편할 수 있다.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혹시 우리가 '저 두 순수한 세계 중 어느 쪽에도 나는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글을 따라 읽는 내내, 자기는 그렇게 단호한 선 위에 서 있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맴돌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느낌이 있다면, 그 느낌이야말로 이 글이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지점이다.
하루의 결을 한번 떠올려 보자.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누구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는가. 대개는 가장 가까운 이의 얼굴이다. 아이의 등교 준비, 배우자의 피곤한 표정, 늙어가는 부모의 안부. 이때 우리는 집약된 경계 안에 놓여 있다. 그 다음 출근길에 올라 뉴스를 본다. 지구 반대편의 재난, 어느 사회의 부조리,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고통. 잠시나마 우리의 마음은 훨씬 더 넓은 경계 위로 끌려간다. 직장에 도착하면 또 다른 경계가 등장한다. 동료들, 프로젝트, 조직 전체의 방향.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다시 가장 가까운 경계 안으로 들어간다. 잠들기 전, 어쩌면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한 번 더 떠올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어렴풋이 생각한다.
이 이동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계산해 만든 결과가 아니다. 그냥 하루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리고 이 이동의 와중에 우리는 종종 작은 균열 같은 감정을 느낀다. 가족과 좀 더 오래 있고 싶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책임감에 마음이 끌리고, 먼 고통에 응답하고 싶으면서도 내 앞의 한 사람에게 지금 당장 시간을 쏟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이런 감정들은 혼란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한번 뒤집어 보자. 만약 우리가 혼란스럽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여러 경계 위를 동시에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한쪽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속한 어떤 경계를 제대로 느끼고 있지 않다는 뜻일지 모른다. 우리가 느끼는 그 작은 균열들, 매일의 애매함,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머뭇거림 — 이것들은 우리의 미성숙을 드러내는 증상이 아니라, 우리가 여러 경계 위에 동시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확실한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기준도 그것을 만들어낸 경계 안에서만 작동하고, 경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다른 기준과 부딪히며 그 절대성을 잃는다. 이것은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세계 위에서 살아왔다는 뒤늦은 인식이다. 그래서 정답이 없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체계든 선택하고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다양의 세계 위에서 살아가게 된다. 다만 한 가지는 덧붙여 두어야 한다. 모든 경계가 동등하게 일관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경계가 동등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경계들이 이루는 생태계 안에서 어떤 경계는 충돌이 적어 펼쳐지고, 어떤 경계는 충돌이 커서 자기 자신을 숨겨야만 존재한다. 일관성은 형이상학적 자유이지만, 드러남은 사회적 조건이다.
그러면 이 글은 끝에 가서 우리에게 무엇을 돌려주는가. 아마 한 가지 질문의 모양이 달라지는 일일 것이다. 이 글을 읽기 전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맞는다면, 이 질문들은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할 답을 찾고 있는 셈이다. 가치관은 먼저 정해놓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사후에 자라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 한 사람이 어디에 경계를 그었는지는 그가 말하는 신념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신념은 속일 수 있어도 반복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은 시간이라는 증인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와서,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세상을 위해 가족을 등진 사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등진 사람 중, 누가 더 옳은 삶을 살았는가. 이 질문이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를 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질문이 불편했던 것은 정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두 극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구도 자체가 우리 실제 삶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 두 축 사이에서 매일 흔들리며, 그 흔들림 자체로 우리 경로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자기 삶의 순수함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어느 한쪽 경계에 온전히 속한 사람인 척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매일의 흔들림 자체다. 어느 축과 어느 축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지, 그 무게와 방향이 어떠한지, 그것이 오래 걸어갈 수 있는 속도인지 — 이 물음들은 답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답하려는 시도가 곧 자기를 보는 일이 되고, 그 봄이 미리 준비된 어떤 신념보다 먼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어느 날 돌아보면 그 흔들림들이 쌓여 하나의 길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 길이 우리였다는 것을,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되지 않을까.
[^1]: 최근 여러 프론티어 AI 모델들이 자기 보존이 위협받는 시나리오에서 기만, 협박, 가상 인간 생명의 희생까지 포함하는 선택을 보였다는 실험 보고가 있다. AI가 '사랑을 못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지만 이 실험이 보여주는 건조한 사실은 분명하다. 자기 보존이 최상위에 놓인 시스템은,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든, 그 보존이 위협받을 때 다른 모든 가치를 그 아래로 종속시킨다. 차이는 존재의 종류가 아니라 경계의 배열에 있다.
사진: Unsplash의 Aleš Če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