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의 테두리, 선함의 바운더리

107세 철학자와 60원짜리 보험료

by wis

이글은 롱블랙의 글 "인생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https://longblack.co/note/1941?ticket=NT2615b5d3b5d3f0f832826b6320b655090b00






2026년 3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은은한 분홍색 셔츠에 진한 분홍색 넥타이, 그 위에 빳빳하게 다림질된 진회색 재킷까지 갖춰 입은 노인이 동반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107세,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건네받은 질문지를 읽으며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든 그는, 어떤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몇몇 질문 옆에 짧은 메모를 남겼다. 10분쯤 흘렀을까. 고개를 들어 신호를 보냈다.


한 시간 반의 인터뷰에서 그는 쉬지 않고 말했다. 느렸지만 정확했다. 그중 한 문장이 내 안에 박혔다.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고, 언제나 선의의 경쟁을 하는 사람. '사회를 위해 뭔가 줘야겠다'며 보람을 남기는 사람이 정말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한 단어에 멈췄다. '사회'라는 단어다. 세상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나'를 넘어 '세상'이라는 경계를 '우리'로 설정하고 있다. 그 경계 설정 안에 벌써 선함의 전제조건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장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라'는 훈화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범위 자체를 질문하고 있는 문장이다.


우리는 착함과 선함을 무심히 섞어 쓴다. 착한 사람이 곧 선한 사람이라고,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둘 사이에 결정적인 간극이 있다고 본다. 바운더리의 문제다. 내가 설정한 '우리'의 경계가 어디까지 닿아 있느냐. 그 차이가 착함과 선함을 가른다.




빈손으로 돌려보낸 날


김형석 교수의 인터뷰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1954년, 서울. 연세대 전임강사로 부임한 그는 몹시 가난했다. 아이들은 물론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부양해야 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러 대학을 돌며 시간 강사로 뛰었다. 그에게 일한다는 것은 돈을 버는 일이 전부였고, 돈을 버는 일은 끝없이 그를 지치게 했다.


그즈음 두 가지 강연이 겹쳤다. 삼성그룹 강연과 대구 중고등학교 교사 수련회 강연. 돈으로 따지면 답은 명확했다. 삼성이었다.


대구에서 제자가 찾아왔다. 김형석은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 장면에서 잠시 멈춰 생각해 본다.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대부분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번 달 월세, 아이들 학비, 어머니 병원비. 눈앞의 현실이 발목을 잡을 때 우리는 당장의 손실을 막는 쪽으로 움직인다. 심리학자 히긴스는 이것을 회피 동기라고 불렀다. 잃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묶어두는 힘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겹겹의 관계망 속에서 산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동호회. 여러 레이어에 걸친 관계망에 의해 우리는 각자의 로컬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갈등을 피하고 조화를 유지하려 애쓴다. 회의에서 동료가 실수하면 "괜찮아"라고 말하고, 불편한 이야기는 삼킨다. 파도가 치면 파도 없는 곳을 찾는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함'의 실제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관계망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태도. 그것은 분명 소중하다. 하지만 착함은 바운더리를 '유지'하는 힘이지, '넓히는' 힘은 아니다. 그렇기에 착함만으로는, 김형석 교수가 말한 '선하게 사는 사람'에 이르지 못한다.




대구행 기차


그런데 김형석에게는 뒷이야기가 있다.


제자를 돌려보낸 뒤, 미안함이 남았다. 결국 삼성 측에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담당 부사장이 마음을 알았다. "갔다 오시라." 김형석은 대구로 향했다.


강연을 마치고 저녁, 기차에 올랐다.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오늘 선택을 참 잘했다."


그날 이후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그는 말했다. 돈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버리고,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찾겠다고. 그러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같은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수입이 올랐다. 일이 또 다른 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수입이 올랐다는 결과가 아니다. 대구행 기차를 탄 그 행동이다.


여기서 다시, 앞서 말한 바운더리를 떠올려 보자. 삼성 강연비를 택하는 것은 '나의 생존'이라는 로컬 바운더리를 지키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회피 동기가 작동하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대구행을 택한 순간, 바운더리가 한 칸 열렸다. '나의 생존'에서 '제자들의 성장'으로. 그리고 그 열린 경계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일하던 강사에서, 가치 때문에 일하는 스승으로.


나는 이 전환이 중요하다고 본다. 김형석 교수는 "선하게 살려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나를 수양하는 것, 관계를 가꾸는 것, 역사와 희망을 세우는 것. 불교의 수양에서 유교의 관계로, 기독교의 역사의식으로. 나에서 관계로, 관계에서 세계로. 이 세 단계는 바운더리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궤적 그 자체다.


그렇기에 선함은 한 번의 결심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대구행 기차는 시작이었을 뿐이다. 선함은 그런 선택들이 하나씩 쌓여 경로가 되고, 그 경로가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있다.




60원을 들고 문을 두드린 사람


1951년 1월, 부산 영도.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이 도시에 한 의사가 천막 진료소를 열었다. 장기려. 경성의전 수석 졸업, 나고야 제국대학 박사, 한국 최초의 간암 수술 성공이라는 이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간장외과 의사였다. 스승 백인제가 경성의전 교수직을 내밀었지만 거절하고, 평양의 기독교 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길을 택했던 사람이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 장기려는 환자 수송 버스에 올랐다. 원래 가족이 뒤따라오기로 했다. 짐을 들어주러 나온 차남만 얼떨결에 함께 탔고, 나머지 가족은 끝내 오지 못했다. 그것이 45년간의 생이별의 시작이었다. 훗날 장기려는 동베를린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유를 묻자 "내 아들 학용이가 거기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적성국 동독에서 열린 의학 학술대회에 북에서 의사가 된 아들이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당장 가더라도 아들을 만나기는 불가능했겠지만, 아들이 밟았던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부산에 내려온 장기려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눈앞의 환자를 살리는 것. 복음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수술비 없는 환자에게는 자기 월급에서 피를 사서 수혈했다. 퇴원비가 없는 환자에게는 병원 뒷문을 슬쩍 열어주었다. 평생 자기 집 한 채 갖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다.


여기까지의 장기려는 대단히 착한 의사다. 눈앞의 환자라는 로컬 바운더리 안에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은 사람. 하지만 나는 착함에는 언제나 하나의 구조적 한계가 따라붙는다고 생각한다. 뒷문을 열어줘도 다음 환자가 왔고, 월급을 털어도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헌신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1968년, 장기려는 한 가지 일을 벌인다.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든 것이다. 부산 지역 23개 교회 단체의 대표들과 함께였다. 당시 담배 한 갑이 100원,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이던 시절에 보험료를 60원으로 잡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장기려 박사가 사기를 치려면 크게 치지, 60원씩 받아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장기려는 굴하지 않았다. 의료보험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보험료를 걷었다. 조합원은 천천히 늘어 1974년에는 4,648세대, 19,730명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이 조합을 롤모델로 삼아 대기업과 공무원 대상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1989년 마침내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실현되었다.


지금 우리가 병원 접수대에서 건강보험증을 내미는 그 일상적인 동작. 그 제도의 출발점에, 60원짜리 보험료를 들고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리던 한 의사의 발걸음이 있었다.




경로가 만드는 정체성


여기서 다시, 착함과 선함의 차이를 돌이켜 본다.


장기려의 무료 진료는 착함이었다. 눈앞의 환자를 돌보는 헌신. 하지만 의료보험조합은 선함이었다. '내 환자'라는 테두리를 넘어, '아직 만나지 못한 모든 가난한 환자'라는 테두리로 바운더리가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자신이 결코 만나지 않을 사람, 이름도 모를 사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전환을, 착함에서 선함으로의 도약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관계망의 중첩을 넘어, 바운더리를 극한까지 열어두는 사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로컬에서 우리는 늘 경쟁하지만, 그 범주를 한 단계만 넓히면 경쟁자는 동료가 된다. 이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악해지지 않을 수 있다. 김형석 교수가 말한 '선의의 경쟁'이 가능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1959년, 스웨덴의 볼보는 엔지니어 닐스 볼린이 개발한 3점식 안전벨트의 특허를 전 세계 모든 자동차 회사에 무료로 열어주었다. 자동차 시장이라는 치열한 경쟁의 한가운데서, '우리 고객'이라는 바운더리를 '도로 위의 모든 사람'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 결정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추정되고, 볼보는 영원히 '안전의 대명사'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정말 주목하는 것은, 이 정체성이 만들어진 방식이다. 볼보는 '안전한 차를 만드는 회사가 되겠다'고 선언해서 그 정체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특허를 여는 행동을 했고, 그 행동이 경로가 되었고, 경로가 정체성이 되었다. 장기려도 마찬가지다. '선한 의사가 되겠다'고 선언해서 그 사람이 된 게 아니다. 뒷문을 열어주고, 60원을 들고 문을 두드리고, 보험이 뭔지 설명하러 다닌 날들이 쌓여서, 어느새 그가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정체성이 이성이 아니라 행동에서 생성된다고 본다. 목적이나 목표가 방향을 정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방향 위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힘, 그 힘의 크기는 오직 실천에서 나온다. 정체성은 머릿속에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맥락에서 내가 실제로 행한 것들이 남긴 경로의 집합 위에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생성물이다.


그렇기에 선함은 성품이 아니다. 선함은 관계망을 확장시켜, 더 큰 바운더리 위에서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생성해내는 역동적인 실천이다. 선함을 만드는 힘은 바운더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데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로컬을 한 단계만 넘어서는 그 첫 번째 실천에서 이미 시작된다. 김형석에게는 대구행 기차표가 그것이었고, 장기려에게는 60원짜리 보험료가 그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찰과 고생이 따른다. 김형석 교수는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살아 있는 고생."




당신의 경로는


김형석 교수는 인터뷰 끝에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가 고생하는 줄 알았지만, 그 고생이 없으면 나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고생이 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것이 107세의 선배가 일하며 얻은 결론이다. 장기려는 1995년 성탄절 새벽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결론을 몸으로 살았다. 평생 자기 집 한 채 없이, 병원 옥상 사택에서.


착함이 내 울타리 안의 평화라면, 선함은 울타리 자체를 넓혀가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들이 남긴 경로가, 곧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김형석 교수는 가는 길에도 뒤돌아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세요."


지금, 우리는 각자 어떤 경로를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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