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넘게 해 오던 일을 그만두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글을 쓰기 위해서라고 말을 했지만 막상 그만두었을 때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인생이란, 목적지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쓸데없이 책임감만 강해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을 하나하나 계획하고 그 계획에 맞춰 ‘나아가는’ 것에 무게를 두며 살아온 삶이었기에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했었나 보았다.
내가 가진 모든 인습적인 이름들-아내 엄마 며느리 딸 선생님 등등-에서 완벽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뿐만 아니라 그 대상 또한 힘들게 한 것 같았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우리 5남매 중 위로 세 명을 대도시로 유학을 보내 주었다.
먼저 와 있던 오빠는 그날 나와 내 동생을 앉혀놓고 ‘왕대밭에 왕대 나고 쫄 대 밭에 쫄 대 난다’는 거창한 훈시를 했다. 두 살 위인 오빠도 그 의미를 충분히 알고 했던 말이었을지가 의심스러운데 그 말을 듣는 우리는 당연히 의미도 모른 채 분위기에 압도되어, 뭔가 대단한 사명을 띠고 이렇게 유학을 오게 되었으니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 내어 부모님께 뿐만 아니라 이 집안을 일으키는데 큰 몫을 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내가 아닌 우리가 중요한 시대였고 집안을 위해 나의 삶을 몽땅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시대였었다.
한 집안의 빼어난 왕대 하나를 얻기 위해 딸들은 공장으로 가야 했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런 시대에 대도시로 딸들을 그것도 학업을 위해 보내 주신 부모님에게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한 정신무장이 습이 되어 버린지라 모든 일에 나는 전투적인 자세로 임했었나 보다.
시대가 변하여 이제 더는 그러한 전사들이 필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엄마 때문에 숨이 막힌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바친 내 일생에 대한 배신감으로 옴 몸이 떨렸었다. 내 삶을 흔들어 놓는 쓰디쓴 말이었기에 말이다.
‘인생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어 소멸시켜야 진정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苦 集 滅 道’ 사성제를 표방하며 석가족의 싯다르타 태자가 이 땅에 출현하신 의미를 뼛속 깊이 느낄 그러한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정말이지 삶이 고통스럽다는 말을 가슴 깊이 느껴보지는 못했었다. 기껏해야 식구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쓰고 싶은 만큼의 돈이 벌리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좋아할 때, 승진에서 미끄러질 때, 그럴 때는 힘들고 괴로웠었다.
하지만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좋을 수도, 언제나 나쁠 수도 없는 법이니 얼마간의 고통을 겪게 되면 다시 좋은 일이 있게 마련이고 이렇게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더냐? 자조하며 스스로를 추슬러왔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으로 기억되지도 않았었다. 이 말을 듣기까지는.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나는 훌륭한 엄마였다.
언제나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고, 조언은 할지언정 결정은 본인이 내리도록 해 왔으니까.
착각은 언제나 문제의 씨앗일 뿐이다.
상대의 시각에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하고 머리 좋은 엄마, 결론으로 유도해 가는 화려한 언변의 엄마라는 높은 벽 앞에서 NO라고 말할 용기도 근거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사 잡다한 일들을 두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苦라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수도 없는 날들을 기도하고 의지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며 견디어왔다. 그리고 조금은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 글을 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고도 않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서이다.
비록 그들이 무시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그러한 삶이 없었다면 지금 개인의 자유를 외칠 평화로움은 없었을 것이기에. 내 삶은 나름대로 소중했으며 가치 있었다고 믿기에 글을 쓴다.
하지만 이제 더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쏟은 열정만큼 집착의 강도가 따라 올 가능성이 높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