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난다. 며칠 전부터 계속 울려대는 카톡 소리가 거슬려서 진동으로 바꾸었더니 잉~잉~ 울려대는 것이 마치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는 케이블카를 보는 듯이 신경을 바짝 쪼여오는 것 같다.
친정엄마의 80세 생일을 기해 엄마와 딸들의 여행을 위한 것이다.
엄마 평생 자식들 키울 때는 학비에 생활비에 매일매일 살아내기가 버거운 삶이었고 자식들 여의고 한시름 놓을 때가 되니 이젠 자식들이 살기 바빠 벼루기만 하던 여행을 이렇게 가게 된 것이다.
유럽여행으로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베트남 태국까지 갈 만한 곳은 다 거론되었지만 결국엔 수십 년째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들이 우리말이 듣고 싶고 우리 밥을 먹고 싶다는 말에 결국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목적지가 되고 말았다. 동생들이야 아이들이 모두 외지에서 생활을 하고 있고 남편들의 벌이가 좋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여행이지만 직장인인 나는 대신해 줄 사람을 구할 수 없으니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닐뿐더러 모든 일을 주선하고 계획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먼 강원도 산자락엔 제법 단풍이 들어간다고 할 때쯤 우리 집 여자들 넷이 그렇게 모이게 되었다. 살면서 한 번은 꼭 와보리라 작정하던 고급 호텔에 모여 웃고 떠드느라 하루 밤낮을 헐거이 보내 버렸다. 가까운 친척들의 근황과 최근 아버지의 건강 이상에 이르기까지 중구난방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갈팡질팡 널을 뛰었다. 얘기 상대가 없던 동생들과 엄마는 시들어가던 호박 줄기가 비를 만난 것처럼 눈에는 생기가 돌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반가움의 기쁨이 다 해 갈 때면 의례히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고 지난날의 가난과 억울함을 함께 해온 추억들은 결국엔 눈물로 마무리를 하여 다시 한번 우리의 유대감을 굳건히 하는 것이다.
혼기에 찬 자식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쪽으로 흘러가고 은근한 자식 자랑을 겸한 배우자감들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조카애들뿐만 아니라 동생들조차 오랜 시간 외국에 살다 보니 사고방식 또한 나와는 많이 달라 아직도 자식에의 집착을 놓지 못해 들어올 사람에게 불만이 있는 나에게 충고가 이어졌다. 이제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아이에게 미칠 영향력이 하나도 남지 않은 허수아비 같은 언니가 아직도 그들에겐 굳건하게 자리 잡은 기세 등등한 인물로 보이나 보았다.
마음껏 원망할 대상이 있는 자식들.
좋을 때도 슬플 때도 혹시나 나로 인해 지들 인생이 덜 행복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부모 된 자의 위치.
육십을 바라보는 우리들조차 아직도 안 좋은 것은 부모 탓을 하며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는데 자식들 뒷바라지로 자신들의 노후를 자식에게 의존해 살기 때문에 자식들 앞에서 큰소리는커녕 이쪽저쪽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엄마의 입장을 보면서, 내 자식에게 돈으로나마 갑질 할 수 있는 내 위치 또한 엄마와 별반 다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저 부모 된 자는 자식을 낳는 순간 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스스로 좋아서 기꺼이 하는 을 이였지만 어느 순간 쪼그라든 진짜 을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될 때의 서글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동생들은 아직 그런 을이 되지 않았는지, 정말로 현명한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다 보니 그런 갑을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마냥 당당하다. 한낱 꿈같이 지나가 버린 지난 세월이 그저 아득하고 멍멍할 뿐이다.
서울에서 이틀을 묵고 우리는 남해안 투어를 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리에 익숙지 못해도 얼마든지 길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기계의 도움이 있으니 뭐가 장애가 될 것인가. 간간이 내다보는 바깥 풍경도 몇 시간째 계속되다 보니 시들해지기 마련이라 어릴 적 메뚜기 잡던 들판 얘기로, 가을무로 담는 김치 맛의 달콤함, 100포기씩이나 담던 옛날 김장 이야기- 사실 동생들은 나이가 어려서 내 기억으로는 김장을 할 때 함께 한 적이 없었다- 가 이어졌다.
‘옛날에 범 잡아보지 않은 사람 없다’ 더니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다들 그지없는 효녀였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가난을 겪은 것 같았지만 사실 우리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었고 지금 21세기와 비교해서 빈한해 보일 뿐, 그 시대 보통사람들의 삶이었지 특별히 우리만이 견뎌내야 했던 가난은 구경도 못해 보았는데도 더 슬프고 더 괴로운 신파조의 옛날이야기로 발전되어가고 있었다.
남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차를 몰면서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자연미를 한껏 누리고 한껏 먹었다. 엄마의 생일인지 우리 생일인지 모를 모처럼의 여유였다. 마지막 밤 엄마는 우리 딸들 셋을 옆에 끼고 누워 “이런 게 사는 맛인가 보다 너들은 딸들이 있으니 이렇게 할 날들이 있겠지만 너들 올케는 아들들뿐이니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한숨이었다. 엄마의 행복한 순간들이 딸들에게도 이어질 거라 여기는 엄마를 보며 이미 자식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는 나에게도 <품 안의 자식> 같은 자식을 다시 안아볼 수 있는 날들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살아온 환경도 위치도 달라 알게 모르게 조그마한 상처를 주고받은 여행이었지만 우리는 피를 나눈 자매이고 한 엄마의 딸들이었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예쁘고 살갑고 듬직한 딸들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금쪽같은 딸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최소한 우리 엄마의 푸짐한 뱃살을 만지며 깔깔 댈 수 있는 날까진 우리의 유대감에 이상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