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ya Jun 20. 2020

고등어 대가리 된장찌개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다 보면 의례히 그리움이나 후회 같은 감정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 날을 그러한 감정들에 사로잡혀 허우적 대는 날들이 많았기에 가급적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린 것이기에 그러할 낌새가 보일라치면 의식적으로 더 현재에 치중하려고 노력해 온 것 같다.

브런치에서 한식과 관련된 글을 응모하라는 안내문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아래의 일들을 의식의 저편으로 미뤄두었을 것이다.


  육십이라는 이 나이를 들으면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 저 정도의 나이면 오랫동안 음식을 만들어 왔을 것이고 자신만의 특별한 음식이 한 둘쯤은 있을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음식을 소개할까?'라고.

그러나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나만의 음식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맨날 먹는 평범한 국과 반찬들 게다가 멋진 그릇에 시각적 효과도 낼 줄 모르다 보니 누군가 그다지 그리워할 그런 음식은 아닌 것 같다. 언제든 직접 만들어 해먹을 수 있는 이 음식들이 그렇게 생각날리는 없고 내 음식을 주로 먹는 식구들을 빗대어 생각해 봐도 썩 떠오르는 음식은 없다.

  큰아이와 갈등을 겪고 있던 몇 해 전, '나도 우리 엄마를 이렇게 속상하게 했겠구나'라는 생각에 내 집 친정과 그곳에 계실 엄마가 몹시 그리웠었다. 그리고 이 음식이 먹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20년은 젊었을, 그 당시 내 기억으로는 전혀 젊지도 예쁘지도 않던 우리 엄마가 만들어 주던 고등어 대가리 된장찌개이다.


  고등학생인 오빠 밑으로 쇠도 녹일듯한 식성을 가진 두세 살 터울의 다섯 남매들이 우리 식구들이었다.

도시 근교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만 오시다 보니 주중의 반찬들은 볼품도 영양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음식들이었다. 

맏딸이다 보니 나는 대체로 해거름에 엄마의 시장보기에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 모녀의 시장보기는 우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딱히 무슨 음식을 해 먹겠다는 계획에 따라 재료를 사러 온 것이 아니라 그날 시장의 사정에 따라 싸고 푸짐한 것들을 눈여겨보며 훑어 가다가 저녁 반찬들을 새롭게 생각해 낼 때가 많았다. 값이 싸면서도 성장기 아이들의 묵직한 뭔가를 먹고 싶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고기 대신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생선이었고 생선중에서는 단연코 고등어가 맞춤이었다.

생선 가게에 도착한 엄마는 여느 손님들처럼 좌판대를 끼고 주인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좌판대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뭔가 조용하고도 쭈삣한 투로 주인과 무슨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남들보다 더 커다란 봉지를 받아오곤 했다. 그렇게 큰 봉지를 갖고 와도 우리가 고등어의 형태를 띤 생선구이를 먹는 것은 아버지가 오실 때뿐이었다. 그 많은 고등어는 도대체 누가 먹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이미 너들 뱃속에 다 들어가 있다'라는 대답만을 들을 뿐이었다.


  엄마가 생선가게에서 가져오던 그 큰 봉지에는 포를 뜬 고등어 세 마리와 남들이 버리고 간 것까지 합친 생선 대가리와 뼈들이 수북이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우선 세 마리의 온전한 고등어는 주말을 위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나머지 부산물들을 큰 들통에다 넣고 핏덩이와 내장들을 깨끗이 씻어낸 뒤 2시간을 푹 끓인다. 그렇게 고아낸 대가리와 뼈들을 일일이 손으로 살과 가시를 분리해서 담아놓고 삶아놓은 시래기에 된장 고추장 약간 고춧가루 풋고추 양파를 넣고 손으로 팍팍 섞어준다. 2시간을 끓여놓은 물에 그 발라놓은 살과 치대어 놓은 시래기를 넣고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끓인다. 먹기 직전에 파와 마늘을 듬뿍 넣고 살짝 끓여준다. 

그 당시 우리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 찌개를 먹었고 다른 모든 음식 또한 그러했지만 남아나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자주 돈을 빌리러 가는 이웃들은 맨날 돈 없다고 하더니 식구들은 전부 다 허옇게 살이 쪄서 다닌다고 했었단다. 실제로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밥만 들고 저녁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그 음식이 그렇게 여러 손을 거치고 젊은 아낙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만들어진 것인 줄을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채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아낙이었을 뿐이었는데 우리에겐 그저 엄마였고 엄마로서 거둬야 할 자식들일뿐이었다.


  마음껏 투정을 부릴 수 있고 그래도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사랑의 확신이 있는 곳이 엄마의 품속이었고 그 사랑의 표현이 이러한 음식들이었다.

아직도 나는 엄마의 된장 고추장 간장을 갖다 먹는다. 시집간 내 딸 조차 외할머니의 장을 좋아하며 가져간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엄마의 된장처럼 품어주는 아량은 부족하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고마움도 미안함도 지니지 못하고 속사포로 서운함을 표현하고 일일이 내 어려움도 까발린다. 정성과 사랑이 곰삭을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온 걸 자책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만 우리 엄마표 고등어 된장찌개를 내 아이들에게도 이어주면서 그 사랑에 편승해 내 부족함을 살짝 가려 보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산타는 떠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