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미래를 전망함에 있어 사람들은 주로 ‘기술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보다 근원적인 변화가 인간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기술의 변화 못지 않은 급격한 바뀜이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나고 있고, 미래는 그 변화를 통과한 새로운 인류의 시대가 될 것이다. 미래의 주역이 될, 그리고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이 새로운 인류를 나는 ‘다차원 인류’라 부른다.
‘다차원 인간’은 3차원을 넘어 4차원, 5차원 세계를 다루고 운용할 줄 아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의미한다. 표현을 바꾸면 그간 우리가 의식 혹은 영혼이라 불러온, 존재의 또 다른 차원을 물질처럼 자유롭게 활용할 줄 아는 새로운 인류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시대는 통찰, 영감, 직감이 발달한 인류의 모습으로 다가와서 종국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적‧영적 능력을 지닌 인류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미래와 과거가 혼재한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다가올 미래의 모습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이미 근대를 거치면서 ‘육체적 힘’이 ‘지력智力’에 자리를 내 주는 사회적 가치의 변화를 경험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이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에게 ‘지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장수와 기사의 시대’가 저물고 ‘지식인의 시대’가 동트면서, 사회적 가치의 중심이 빠르게 ‘지력’으로 이동했다. ‘육체적 힘’은 ‘노동력’이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되었고, 대신 ‘지력’이 경제적‧사회적 가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도 ‘지력의 계발’로 이동했고 그 시대가 무르익은 지금, 우리는 가장 평범한 시민조차 과거의 학자를 능가하는 ‘지적 능력’을 갖춘 시대에 살게 되었다(지금은 전쟁도 육체의 힘에 근거한 육탄전이 아니라 ‘지적 능력’에 바탕한 경제전쟁을 벌인다).
이 글에서 예측하는 변화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의미한다. 근대 이후 인류가 지력으로 쌓아 온 모든 지식이 인공지능에 이양되면서 이제 인간에게는 새로운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이 시대가 통찰이나 공감, 영감이나 직관과 같은, 그간에도 존재해 왔지만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인간의 또 다른 역량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이 알고 계실 것이다. 이제 지식은 기계에 맡기고 인간은 보다 고차적 정신 역량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런 역량이 어떤 구조를 통해 어디서 발현되는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그러한 역량을 기를 수 있는지 잘 모른다. 메타인지, 공감 능력 등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그것이 왜 가능한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다룰 주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고차적 정신 능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다차원 인간’도 이러한 능력을 극대화한 인간, 그리하여 미래 사회의 주류가 될 새로운 인간을 말한다. 물론 다차원 인간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능력 외에 아직 인식조차 하지 못한 잠재 역량까지를 모두 꽃피운 새로운 인류가 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에 인류가 이루어 온 놀라운 결실을 보면, 이제 막 시작된 ‘고차원 정신 능력’에 대한 환기가 인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다차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것은 몇 줄로 요약하여 전달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아직 차원은 물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서도 명확히 합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다차원 인간’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이 본래 ‘3차원의 육체적 존재’일 뿐 아니라, ‘4차원 시공간에 존재하는 미시적 몸’, 그간 우리가 ‘혼’이나 ‘의식’이라 불러온 또 다른 차원의 몸 또한 동시에 지닌 존재라는 자각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이것은 인간의 고차적 정신 능력이 ‘물질’ 차원 뿐 아니라, ‘미시’ 차원까지 고려될 때 해명될 수 있는 문제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 글 안에서 ‘차원, 정신, 몸’이 하나의 의미 체계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영혼을 포함한 인간 존재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을 제안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인류 문명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가게 될지를 예측해 보는 데 있다. 물론 이는 글을 쓰는 저자뿐 아니라 글을 읽어야 하는 독자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또, 아직 영혼과 의식의 비밀조차 밝혀지지 않은 시대에 통합적인 인간 존재론을 그려보겠다는 꿈은 마치 구석기 시대인이 다가올 물질문명의 미래를 예측해 보려는 것 만큼이나 어설프고 설익은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소의 오류를 각오하고서라도, 작업이 시도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전체 지도를 가지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시행착오로 가득할 수밖에 없고, 그 시행착오는 결국 많은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40년에서부터 1970년대까지 최소 수만에서 수십만의 사람이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 에가스 모니스(Egas Moniz)가 근대적 의미의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하여 어떠한 수단으로도 치료되지 않던 중증 정신병 환자를 얌전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49년 노벨 생리의학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전두엽은 인간의 고차적 정신 활동에 필수적인 영역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 시술을 받은 사람 중에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여동생 로즈메리 케네디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즈메리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주선으로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는 한 지엽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 구조와 연결망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분에 가한 충격이 어떤 부작용으로 돌아올지는 실제로 현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하나의 사례는 될 것이다. 최근 과학은 인간의 정신을 ‘뇌의 부수적 현상’으로 보는 물리주의에 입각해 인간의 정신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속속 가시적인 연구 성과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연구 결과들은 곧 이론적 연구를 넘어 약물 혹은 스스로 판단하는 로봇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과 존재에 물리적인 영향을 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용화될 때 사람들은 그것이 지닐 효과 또는 효용에 주목해 낙관적 기대에 부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복잡한 생명계 전체로 봤을 때 어떤 부작용을 낳게 될지는 인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 없이는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기술의 효용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정신의 문제를 탐구해 온 사람들이 마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과학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의식의 세계를 경험적으로 오래 탐구한 결과, 인간의 정신을 뇌만으로 환원하는 방식이 인간의 존재 전체에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깊은 우려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간의 경험적‧이론적 공부로 알게 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기는 쉽다. ‘모른다’고 생각하면 알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위험한 일은 ‘모르는지 몰라서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들’에서 온다. 나는 이 글이 그간 우리가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인간과 세계의 한 측면’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과 세계에 관한 탐구가 보다 폭넓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