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휴직 그리고 이민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오래된 자주색의 폭스바겐, 외제차다. 이미 배로 모든 짐을 부쳐 놓아, 겨우 작은 가방 하나가 다 인 나의 짐을 싣기에는 트렁크가 좀 컸다. 세부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먼저 뉴질랜드로 온 남편과 시어머니는 나의 귀국을 많이 반가워하셨다. 공항에서부터 집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이 낯설었다. 넓은 초록색을 지나면 하얀 양들과 갈색 소들이 나왔고 다시 초록색이 나오다 하얀색 갈색이 반복되면서 20분쯤 차를 탔다. 이제 곧 높은 건물도 나오고 사람들도 볼 수 있겠다고 기대했지만, 조금 더 진한 초록색인 들판을 지나 몇몇 새로 지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로 들어서자 차가 멈춰 섰다. 화려한 빌딩도 아직 보지 못했고, 스타벅스 컵을 손에 쥐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블론드 외국인을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 차가 멈추고 말았다. 분명 남섬에서 두 번째 큰 도시라고 했는데 말이다. 나는 도시를 좋아한다.
“ 여기가 우리 집이야.” 차의 천장에 있는 알 수 없는 검은색 버튼을 자연스럽게 누르며, 부드러운 눈빛과 함께 남편이 나를 뒤 돌아보았다.
“응” 버튼을 누르자 드라마에서만 보던 차고의 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자동으로 열리네 와~”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 와 ~자동이지? 집 어때? 예쁘게 잘 지어졌지?” 그동안 얼마나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몰랐다는 듯 한껏 밝게 웃으신 어머니도 뒤자석을 돌아보았다.
“ 네 집이 정말 좋네요.”
저 푸른 초원 위에 새 하얀 2층집은 마치 꿈에서나 보던 궁전 같은 집이었다.
‘이런 집을 부모님께 받고 두 발 뻗고 잠이나 자려나?’
낯선 이 상황, 신나 있어야 할 순간, 이것은 내 인생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과 부담이 파도처럼 밀려와 급격히 어두워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에게 모든 것을 처음으로 준 사람이다. 첫사랑, 첫 연예, 첫 경험, 첫 결혼, 첫 휴직, 첫 이민 그리고 첫 집. 요리사인 남편은 힘들기만 한 한국의 요리사 생활에 지쳐 있었고, 좋아하는 요리를 마음껏 하며 평화롭고 조용히 살 수 있는 뉴질랜드로 의 이민을 꿈꿨다. 남편은 이민을 꿈꿀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기도 했다 ( 이미 일하기로 한 곳이 있었고, 집을 주는 부모님도 있고). 6년의 연예는 무엇인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부모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탐탁지 않아하셨기는 했지만 (신랑감을 소개했던 해에는 아직 소금을 멋지게 뿌리는 셰프가 미디어에서 유명세를 타지 않았던 때였다.) 선 한 눈빛이 좋은 사람 같다 하시면서, 나름 몇 번의 테스트를 하신 후 큰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뉴질랜드에 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사실 우리 모두 현실감이 없었다. 평생 시골에만 사신 엄마는 그저 다른 나라 가서 산다는 말이 거짓말인 것만 같다는 말 만 반복하시며, 뉴질랜드에 있다는 그 집 사진만 보여 달라고 하셨다. 몇 년만 살다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고 하셨고, 사실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귀하게 키운 딸을 멀리 뉴질랜드까지 보내게 되는 건 싫으셨지만 , 우리 집 형편과 달리 넉넉해 보이고, 선한 눈빛을 가진 사윗감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았다.
이민을 추가한 결혼은 어찌어찌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편의 아버지는 결혼은 겉치레라 하시며, 모든 과정을 생략하자 하셨고 , 대신 결혼식 비용을 저렴하게 본인 부담하셨다. 2007년도에 결혼한 내 친구들은 새 하얀 모던 벽장식을 배경으로 결혼식 사진을 남긴 반면, 같은 해에 결혼한 내 결혼식 사진은 누런 용 장식 배경 사진이 남았다. 결혼식에 들인 비용이 절감되어 좋긴 했지만, 우리의 결혼식에 우리가 결정한 건 아무것도 없게 되어 내심 많이 서운했다.
발령 후 2년의 공립유치원 근무는 안정적이었고 즐거웠지만, 뭔지 모를 공허함이 늘 있었다. 기분 좋은 교장실 결제를 받고 나온 날, 다른 초등학교 선생님들처럼 굽 높은 슬리퍼를 새로 개시한 날,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햇살 아래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모든 사력을 다해 일 년 만에 합격이라는 성과를 이루고 해낸 일이 고작 똑같은 이런 인생이라니…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렸을까…’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느꼈었다. 오롯이 공부와 나의 컨디션에만 집중하며 몰입의 일 년을 보냈던 시간들이었다. 사립유치원 교사 시절 내가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이 일이 얼마나 가치 있고 보람이 있는 일인지 알았지만, 미래에 행복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엔 역부족이었던 수입과 근무시간이 주어진 직업이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직업을 유지하되 더 나은 복리후생이 보장되는 교육공무원에 무작정 도전하게 되었고, 일 년 후 모든 것이 완벽했다. 미래의 남편이 힘들 때, 아내로서 남편에게 휴식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었고, 미래의 아이도 손잡고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워킹맘이 꿈이었던 나의 목표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언가로부터 공허함을 많이 느꼈던 그때, 휴직의 결정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충족되는 사유와 함께 공무원 신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가볍고 의무적으로 내린 휴직의 결정은 12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낸 후 사직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