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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지혜 Apr 30. 2022

고등학교 시험 성적 확인하는 날, 선생님의 한마디

칭찬은 여고생을 춤추게 한다

 *작년 기말고사를 마치고 쓴 글을 옮긴다.



  고등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확인하는 학기말이 되면 학생들은 여러 표정을 보인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결과를 합해 최종 등급이 정해지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적은 점수 차이로 등급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긴장하는 표정들. 또는 어차피 이제 학기말이고 방학이 코 앞이니 지나간 결과는 잊고 새로운 시작에 집중하려 한다며 결과를 외면하고 태연해하는 표정들. 싱숭생숭한 분위기의 교실 속에 서술형 채점 결과를 들고 들어가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아이들의 마음을 다잡기 딱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시험 성적은 이렇게 진행된다. 우선 omr카드 리더기가 읽은 정오표가 학생들에게 배부된다. 이후 교사가 각 교실을 돌며 확인을 원하는 학생들에 한해 채점 완료된 서술형 답안지를 확인시켜준다. 우선 학생들은 종합적인 서술형 점수만 받기 때문에 본인이 어디서 감점되었는지 정확히 몰라 감점 사유를 궁금해하거나 억울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여러 교사가 여러 번 검토하더라도 객관식과 달리 서술형은 사람이 채점하다 보니 가끔씩 잘못 채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교탁에 서술형 omr 답안지 스캔 파일을 노트북 화면에 띄워놓고 기다리면 아이들이 한 명씩 줄을 서서 자기 점수를 확인한다. 이때 아이들은 성적이 좋든 나쁘든 긴장하고 온다. 국어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자기 성적을 공개하는 일대일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단 채점 결과에 항의하며 몹시 화를 내는 학생들이 있다. 억울한 마음도 있겠지만 본인이 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선생님이 자기 의견을 묵살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더 드세게 표현하는 것 같다. 자칫하면 이 과정에서 학생도 교사도 마음이 상한다. 이럴 때는 우선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담백하게 왜 이렇게 평가했는지 선생님들의 협의 내용에 대해 설명한다. 그래도 학생이 따지면 내 생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다시 한번 동교과 선생님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해보고 다음날 대답을 주겠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순간 욱하지만 하루 정도 지나면 본인도 어느 정도 타당한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이 지나치게 무례했던 부분에 대해 머쓱함을 느끼며, 자기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다시 한번 동교과 선생님들과 의논해준 선생님의 태도에 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논의한 결과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주면 대체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오해와 달리 교사들은 조금이라도 채점에 오류가 있다고 하면 바로 수정할 의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씩 최상위권 학생들 가운데 끝까지 집요하게 정답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이 문제가 틀려도 본인의 등급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면 안심하고 떠났다.

  그리고 시험을 제법 잘 본 학생들이 있다. 이런 경우 일단 폭풍 리액션을 하며 평소 아껴뒀던 칭찬을 한다. "네가 항상 수업 시간에도 한 번도 졸지 않고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더니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왔구나. 너는 태도가 보배니까 앞으로 성적도 더 오를 뿐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마땅히 성취해나갈 거야. 그런데 말이야..."라고 하면서 왜 딱 하나를 틀렸는지 짧게 상담한다. 상위권의 학생은 작은 실수 하나만 바로 잡아도 최상위권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상위권 학생들은 내용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으나 서술형의 조건을 맞추지 못해 부분 점수를 감점당하는 일이 잦다. 이런 경우 서술형 문제를 풀 때 모든 어절 단위에 밑줄을 그으며 조건을 확인하고 답을 쓴 후 각 조건에 대응되는지 확인해보는 습관을 들일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괜히 겁도 준다. "2학년 되면 애들이 더 기를 쓰고 공부하니까 이번에 잘 봤다고 안심하면 안 되고 겨울방학 때 뭐 공부할 거야? 그렇지, 그거 잘 공부해서 2월 개학 때 선생님한테 어떻게 공부했는지 진행 상황 말해줘. 이렇게 좋은 머리 갖고 불성실하게 공부하면 죄인 거 알지?" 이렇게 말해주면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다음번엔 실수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도 갖고 돌아간다.

  다음으로는 중위권 학생들이다. 아주 풀이 팍 죽어서 내게 온다. 서술형의 절반 정도를 틀렸기 때문에 선생님 볼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쭈뼛대며 온다. 이 아이들도 일단 칭찬부터 던진다. "와아, 이 문제를 맞았네? 이 문제는 잘하는 애들도 많이 틀리는 건데. 일단 우리 **가 공부를 제법 했네. 그치? 이번에 몇 회독했더니 이 정도 맞았어? 그랬구나. 그럼 선생님 보기에 딱 2회독만 더하면 다음엔 대부분은 맞을 거 같아. 이 정도 공부하면 이만큼 맞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딱 그만큼 더 공부하면 점수가 두 배로 오른다는 것도 알 것 같지? 진짜는 고2부터야. **는 겨울방학 국어 공부 계획 세워서 방학식 날 선생님한테 한 번 보여줄래? 이번 방학만 잘 보내면 2학년 때 엄청 성적 오를 거 같은데?" 중위권 아이들은 쉽게 나는 여기까지인가봐 하고 본인의 학습량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이 있다. 조금만 더 하면 상위권으로 진입 가능하다며 각 학생들의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찾아서 무조건 칭찬한다. 그러면 흙빛이었던 얼굴이 환해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심지어 자리에 앉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춤도 춘다. (쉽고 귀여운 것들...)

  끝으로 하위권 아이들이다. 이 친구들은 해맑게 온다. 0점 맞은 자기 정답표를 보면서도 "아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0점이군요!"하고 능청을 떤다. 일단 진로를 물어본다. 예체능을 준비하거나 대학 입시에 뜻이 없는 친구들이 많다. 그래도 백지로 낸 건 일단 나무란다. "정답지를 백지로 내는 건 최악이야. 0.1 점도 줄 수 없단 말이야. 그리고 백지로 내는 건 습관이 돼. 다음엔 수업 때 선생님한테 들은 거 생각나는 거 아무거라도 써. 그리고 진로 고민한다고 공부를 놓으면 안 돼. 공부를 하면서 고민하는 거야. 네가 뜻을 정했을 때 그때 가서 성적이 필요하면 이미 지나간 성적이 너무 아깝잖아. 그렇지? 이번 방학부터는 적당히 공부하면서 진로 고민하기다? 그래도 이렇게 공부를 안 하면서도 그동안 선생님 수업 시간에 안 졸고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해줬네. 선생님이 그건 고마워. **도 밝고 씩씩해서 공부 아니라도 진로 정하면 열심히 잘 해낼 거야. 나중에 샘한테 진로 정해지면 알려줘, 궁금하니까." 평소 수업 시간에 발표도 잘 안 하고 선생님에게 다가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때 잠깐 나눈 대화에 서로 친밀감을 느낀다. 선생님이 자기를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이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시험 성적 확인 날 이후에 아이들을 훨씬 더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공부 상담을 많이 신청한다. 수업 때는 교사 한 명이 한 반 전체를 대하는 관계였다면, 성적을 확인하는 아주 짧은 틈에 개별적인 유대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성적을 확인하는 가장 마음이 낮아져 있는(?) 때에 따듯한 말 한마디는 학생들의 마음을 열기 아주 좋은 기회이다. 보통 1학기 때 이런 시간들을 통해 2학기 때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데, 이번에는 2학기에 복직을 해서 이렇게 친해지다 만 기분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내후년 3학년으로 올라오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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