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
1. 원초적 언어 개념
철학적 개념에 있어서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예컨대, [i] '벽돌'이라는 텍스트는 우리에게 원초적 관념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우리는 무엇을 지칭하는지 의미를 안다. 이는 명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언어로서 흔히 [ii] ‘벽돌’이라는 텍스트를 듣고 감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지칭하는지 안다. 이는 명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ii] ‘벽돌’이라는 텍스트가 적힌 쪽지를 전달할 때, 건축업자는 이 벽돌을 건네기 위해 찾으러 가며 이를 가지고 온다. 따라서 그것을 지시로 이해하여 벽돌을 날라오는 것이다. 『P.I. 17』
위와 같은 언어간 대립이 철학적 담론 뿐만 아니라 일상적 대화에서도 언어적 오해에 기인하여 존재한다. [i] ‘벽돌’이라는 텍스트는 존재하는 모든 벽돌을 지시한다. 그러나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흔히 ‘벽돌’이라는 언어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벽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간의 고찰이 포함되어 있다.
2. 귀납적 추론 그리고 지식의 한계
p =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이었다.
q = 모든 까마귀는 검다.
귀납적 추론이란 개별적 사실들을 종합하여 일반적인 결론이나 진리를 도출해낸다. 귀납적 추론은 경험하는 인간에게 적용된다. 결론 q의 완전한 타당성을 위해 전제들이 아무리 증가한다고 하여도 완전한 타당성에 이를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경험이란 본질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형편, 즉 세태를 말할 때 자연스레 이 법칙에 지배받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당연한 법칙을 인정하여 살고 있는 이상, 일상적 언어에서 일반화에 대한 지적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며 그릇된 지적일 수 있다. - 여담이지만 실제로 흰 까마귀가 존재한다. - 따라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On Certainty』
또 다시 다른 예를 가정해보자. 같은 학교와 같은 반에 있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r = 소크라테스는 사과를 좋아한다.
텍스트의 개념적 의미로 보았을 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크라테스는 사과를 좋아한다.’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같은 반의 학생일 수 있고 네가 아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무언가 뒤틀렸는지) 그 말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일상 언어에서 소용이 없는 비판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했듯 우리가 경험한 사실에 비추어 개별적 사실을 종합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소크라테스를 ‘당연히‘ 경험할 수 없다. 모름지기 모든 소크라테스가 사과를 좋아한다고 주장/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상적 맥락에서는 r 명제는 존재하는 '모든 소크라테를 향한' 일반화의 목적이 아닐 것이라고 자연스레 추론할 수 있다.
3. 그럼에도 귀납적 추론이 유용한 이유란 무엇인가?
귀납적 추론을 통해 그것이 완전한 일반화와 타당성을 확보하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실용적으로 쓰이게 된다. 이는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힌트를 주며 대처할 수 있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귀납적 추론은 바로 과학적 방법의 대표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기술로 변형되어 우리에게 이로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볼 땐 그 자체로 확률적 가능성, 보편성을 나타낸다. 명시되지 않은 거시적인 사회적 전통과 관습, 문화를 짐작하고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조심하여야 하고 어떤 동물을 사냥할 수 있으며 어떤 열매를 먹어선 안되고 어떤 사람을 피해야만 하는지 일깨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