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라는 이름의 감정 노동

[가족관계] 부모의 한숨은 당신의 숙제가 아니다

by 지혜더하기


우리 엄마가 꼭 애가 된 것 같아요.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고,
제가 조금만 무심하면 금방 서운해하세요.
그런데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왜 이렇게 숨이 막히죠?
저, 나쁜 딸인가요?


이 한마디에 담긴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미안함, 답답함,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늙어가는 부모의 퇴행 앞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사랑하지만 버겁다. 보살펴야 하지만 도망치고 싶다. 이 이중적인 마음은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역할 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거꾸로 흐르는 돌봄의 시간


심리학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정서적·현실적 돌봄을 떠맡게 되는 현상을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부른다. 부모가 감정적 지지대가 되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녀에게 의존하며 역할을 뒤바꾸는 상태다.


어릴 적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착한 아이'로 자란 사람일수록 이 굴레에 쉽게 갇힌다.

엄마의 우울을 나의 책임으로 느낀다.

아빠의 외로움을 나의 무능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나 역시 서툰 시절이 있었다.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리면 숙제하던 펜을 내려놓고 엄마의 기분을 살폈다. 내가 잘 웃어야 엄마의 세상이 평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랑하면서도 휘말리지 않는 힘


가족치료의 거장 머리 보웬(Murray Bowen)은 가족 구성원 사이의 정서적 엉킴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자기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라고 정의했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다. 분화 수준이 낮으면 부모의 불안이 곧 나의 불안이 된다. 부모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 속 아들은 스스로 어머니에게 진 빚이 없다고 믿었다. 이미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다했고, 가난했던 집안 형편 속에서 제 앞가림을 해냈으니 부채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노모가 들려주는 옛 눈길 이야기, 즉 자식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 발자국을 되짚어 돌아오던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무너진다. 자고 있는 척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서늘한 진실을 전한다.


아무리 할 만큼 했어도, 부모라는 존재 앞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자식은 없다.


우리를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 그것은 부모의 실제적인 과도한 요구다. 감당하기 힘든 정서적 갈취와 집착은 자녀의 일상을 실제로 마비시킨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를 '나쁜 자녀'로 규정하는 내면의 서글픈 검열이다.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심판이 동시에 일어날 때 우리 영혼은 타 들어간다.


죄책감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랑도 있고, 오래된 가족 패턴의 잔향도 섞여 있다.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그래서 더 괴로운 법이다.



돌봄과 짊어짐은 다르다


마가렛 말러(Margaret Mahler)가 말한 '분리-개별화'를 거꾸로 연습해야 할 시간이다. 아이가 엄마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갔듯, 이제는 늙어가는 부모를 나의 감정적 품 안에서 독립시켜야 한다.


부모의 서운함은 부모의 몫으로 남겨둔다.

나는 나의 일상을 지킨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다. 오래 함께하기 위한 거리다. 밥을 챙겨드리고 병원에 모셔가는 것은 돌봄이다. 부모의 감정까지 책임지는 것은 돌봄이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들의 우울과 고독을 오롯이 떠안는 일이 길어지면,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서로를 소진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부모의 한숨을 전부 받아내지 않는 것은 불효가 아니라, 나를 지키며 사랑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