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드링키지'는 와인 추천 앱의 문법을 모범생처럼 따랐다. 앱을 켜면 취향을 묻는 질문이 이어졌고, 답변이 끝나면 알고리즘이 엄선한 와인들이 화면을 화려하게 채웠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뼈아프게 인정하건대, 그건 현실과 철저히 유리된 '예쁜 쓰레기'에 불과했다.
당시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와인 데이터는 약 4만 개. 수치상으로는 방대했지만, 한국의 와인 유통 구조 안에서는 허상이었다. 국내에 실제 유통되는 와인은 그중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며, 그마저도 매장마다 재고가 천차만별이다. 와인 초보자가 내 앱에서 추천받은 그 '인생 와인'을, 동네 와인 샵이나 편의점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은? 통계적으로 '0'에 수렴한다. 그것은 보물지도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보물을 찾으라는 희망 고문이었다.
나는 사용자의 경험보다 '추천'이라는 기술적 행위 자체에 도취되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멋진 와인을 골라줬으니 사용자는 좋아할 거야"라는 공급자 중심의 오만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구하기 힘든 와인을 추천해 주는 앱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앱은, 만든 사람인 나조차 열어보지 않게 되었다.
이번 드링키지는 출발선부터 궤도를 달리한다. 목표는 명확하다. 사용자가 자신의 막연한 느낌을 정확한 언어로 이해하고, 그것을 전문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통역해 주는 것. 즉, 두 세계 사이의 '가교'가 되는 것이다.
와인은 활자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의 세계다. 아무리 화려한 테이스팅 노트를 읽어도, 직접 혀끝으로 느끼고 목으로 넘겨보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경험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언어 없는 경험은 금방 휘발된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의 완벽한 추천으로 인생 와인을 찾아준다'는 오만한 환상을 버리기로 했다. 신이 아닌 이상, 앱이 사용자의 입맛을 100%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나는 사용자가 반복적으로 마시고 기록하며, 점진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뾰족하게 깎아나갈 수 있는 '구조'를 설계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실패가 필요하다. "이 와인은 너무 셔서 싫어"라는 부정적인 경험조차 데이터가 된다. 그 데이터가 쌓일수록 '내가 산미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나와 맞지 않는 와인을 만나는 순간조차 내 취향의 경계선은 더 뚜렷해진다.
일회성의 '쪽집게 추천'이 아니라, 지속적인 '취향 탐색의 도구'. 사용자가 스스로의 맛을 알아가도록 돕는 나침반. 이것이 내가 새롭게 정의한 드링키지의 본질이다.
회사에서 지난 4개월간 115개의 PRD를 작성했다. 하루에 하나꼴로 새로운 기능을 정의하고, 다듬고, 때로는 폐기하는 치열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 가설의 용광로 속에서 뼈저리게 배운 진리가 하나 있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이 훨씬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기획을 하다 보면 '혹시 몰라서'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 기능이 없으면 사용자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저 기능까지 있으면 더 완벽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덕지덕지 붙은 기능들은 서비스의 비만을 초래한다. "일단 그럴듯한 기능을 다 넣으면 어떻게든 사용자가 오겠지"라는 생각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게으름이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특히 1인 개발자에게 이런 '기능 과잉'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내게 주어진 리소스는 한정되어 있고, 시장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혼자서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코드까지 짜야 하는 상황에서 '나이스 투 해브(Nice to have)'에 쏟을 시간은 없다. 오직 '머스트 해브(Must have)'에만 집중해야 한다.
수많은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예측하지 마라. 최소한의 기능으로 배포하고, 오직 데이터로 검증하라."
수없는 고민 끝에 남긴 핵심 기능은 딱 네 가지다.
1. 온보딩 취향 추천
와인 문화의 첫 진입자에게 '나의 취향'이라는 출발선을 그어준다. 막연한 감각을 구체적인 데이터로 치환하는 첫 번째 관문이자, 앞으로의 여정을 위한 나침반이다.
2. 마신 와인 간편 기록
감각의 데이터화 와인은 마시는 순간 사라지지만, 기록은 남는다. 복잡한 입력 없이 직관적으로 남긴 기록들이 쌓여야 한다. 이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추천의 정확도는 정교해지고, 사용자의 취향은 선명해진다.
3. 현장 추천 받기 (추천 카드)
소통의 번역기 와인 샵이나 레스토랑, 점원 앞에서 작아지는 순간을 위한 기능이다. "이런 느낌 주세요"라며 말로 설명하는 대신, 내 취향이 시각화된 화면을 보여주면 된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언어 장벽을 허무는 가장 직관적인 도구다.
4. 와인 검색
능동적 탐색을 위한 기본 추천이 시스템의 제안이라면, 검색은 사용자의 질문이다. 눈앞에 있는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혹은 마셨던 와인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 언제든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사용자가 주도권을 쥐고 탐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검색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더 많은 기능을 넣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는가. 기획자로서 '있어 보이는' 기능, 트렌디한 기술을 붙이고 싶은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뼈아프게 기억한다. 과거의 드링키지가 외면받았던 이유는 기능이 부족해서도, 화려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에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추천도 사용자의 손끝에 닿지 않으면 공허한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럴듯한 앱'을 만드는 자기만족이 아니다. 이 가설이 거친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깨지는지, 아니면 살아남아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냉정한 '검증'이다.
가설은 세워졌다. 이제는 검증의 시간이다. 사용자가 어느 버튼 앞에서 망설이는지, 어떤 화면에서 이탈하는지, 그리고 기어코 어떤 기능을 다시 찾아와 사용하는지. 그 투박하고 솔직한 데이터의 흔적만이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혼자만의 논리에 갇힌 완벽한 앱이 될 것인가, 아니면 조금 부족해도 누군가의 일상에 스며드는 도구가 될 것인가.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가장 날카롭다고 믿는 4가지의 기능만 남겼다. 이 작은 시작이 와인이라는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선 누군가에게, 아주 작지만 확실한 균열을 내는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