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 호명사회를 읽고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
여기서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는, 선현들이 쌓아온 지혜를 의미한다.
우리가 쭈욱 살아오던 시대는, 전대의 지식이 책과 같은 형태로 저장되어, 후대의 사람들이 그 지혜를 배우고 습득하는 걸로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오랜 시간 굳어진 어깨와 허리를 스트레칭해 가며 꼼꼼히 살펴보고 머릿속에 그 귀하디 귀한 정수들을 새겨 넣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발전된 네트워크 시대에는 내가 알던 정보가, 몇 시간 뒤에 뒤집어져 있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였던 것들이 바로 낡은 사실로 전락해 휴지통으로 사라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실시간으로 오가는 이런 넘치는 과잉정보의 바다 속에서 유랑하는 우리들은 그 변화 속에서 허우적 대기 바쁘다.
이러한 시대에 이제 뉴턴의 저 인용은 더 이상 힘을 얻기가 어렵다.
실시간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거인들 사이에서 어느 어깨에 잘 앉아야 내가 멀리 볼 수 있을지를 연구해 가며 이 어깨, 저 어깨를 넘나들며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선배의 가르침도 점점 그 힘을 잃어간다.
구시대의 관습을 답습하는 태도로 자신만의 비법을 전수하는 선배라면 더더욱.
당장 AI에게 한 문장만 타이핑해서 물어봐도, 바로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이 넘쳐난다. 그보다 더 편리하고 빠른 가르침이 있을까?
조직이 그 힘을 점점 잃어가는 데에는 점점 무용해지는 비법의 전수뿐만 아니라 빛나는 개인들의 등장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들은 조직에 기대지 않고도, 혼자 힘으로도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뮬레이션, 머릿속으로 앞날을 그려보는 일. 내 미래는 어떤 것일까? 현재를 디딤돌 삼아 더 발전된 내일의 꿈을 펼쳐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과잉정보의 시대에는 그 상상력이 더 이상 희망의 빛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암담하고 어두운 미래만이 보일 뿐이다. 내가 가보지도 않은 길들에 대한 실패의 경험담들이 너무나 넘쳐나서, 걷기도 전에 지쳐버린 꼴이 되어 버리기 쉽다.
열심히 하되, 기대는 하지 마라.
요즘 아이들의 입시를 다루는 책에 나온 한 구절이다.
정말, 요즘 아이들의 현재를 그대로 나타내주는 한 마디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은 학원가에서, 학교에서 매일매일 절망을 마음속에 심어야 한다. 정신 차려라, 지금 네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라는 목적으로,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일 년 365일 내내 강제로 들어야 하는 말들이다. 걱정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들 이겠지만, 한 발 멀리 떨어져서 보면 가히 언어폭력에 가깝다.
사회에 나와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일해도 조직 안에서 내 성과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내 기여도를 스스로 정할 수도 없고, 적재적소에 내 능력이 쓰이기도 어렵다. 그런 부분을 노력해서 극복했다 하더라도, 누가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성과가 달라진다.
열심히 해라, 하지만 너희에게 희망은 별로 없어.
김이 쭉 빠지는 소리를 듣고도 힘내야 하는 멘털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성공의 보장도 없는데 어떤 종류의 희망을 갖고 도전할까??
송길영작가는 이런 시뮬레이션 과잉에 의해서 '분석 마비' 상태에 빠지면 스트레스로 무엇이든 실현하기 어려운 행동 마비 상태에 빠져버린다고 경고한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릴 적부터 최선을 다해 달리기는 해 봐, 하지만 골인할지는 잘 모르겠어.라는 말로 의지를 꺾어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치 영웅처럼 빛나는 개개인이 등장한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빛날 수 있었을까?
그 개개인이 될 수 있는 힘은 넘쳐나는 정보가 아닌, 바로 내면의 '나' 자신을 바라봄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과잉정보에 의해, 시뮬레이션되는 미래에 갇혀 불안해하지 않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부터 출발해서, 나와 같이 그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호오 집단을 찾아, 같이 나누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지혜의 불이 되어 주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한다. 서로에게 감화되어,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는 그야말로 집단지성, 동호(同好)를 위한 회(會).
그렇게 자신을 계속 들여다보고, 발전해서 내 색깔을 찾아가고, 그러면서도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끊임없는 배움과 발전은 피곤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곧 진화와도 같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게 진정한 개인으로 독립하고 나면, 조직 안에 속해있으면서도 늘 불안하던 '물경력'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언제 어느 순간에서도 나 자신으로 우뚝 서있을 수 있는 '핵개인'으로서 '호명'되게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두려워하기보다는 박차고 나가서, 신인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저어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보다는
이제부터 나는 뭘 할까? 라며 마음을 두드려 보도록 노력해 보자.
이제 나는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부터 생각해 보도록 해야겠다.
지금은 계속 독서하고, 글을 쓰면서 자신과 대화를 게을리하지 말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는 것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내 뒤에는 든든한 동료들이 늘 있음을 잊지 않기. 그리고 나 역시도 그 동료들의 뒤를 받쳐주기. 그렇게 한 해를 보낸 뒤에, 돌아보면 내 이름이 무엇인지 윤곽이 조금씩 잡혀 나가 있으리라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