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앵거게임> 비하인드 스토리
쾅쾅 발을 굴러요.
악 소리를 질러요.
뭐든지 닥치는 대로 부숴 버리고 싶어요.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중에서-
화의 힘은 강력하다. 마음 속에서 화가 치솟을 때면 불처럼 활활 타오른다. 내 안에 그런 막강한 힘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랄 뿐. 그림책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을 학생들에게 읽어 주면서, 언제 화가 나는지 물었다. 학생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다양했다.
내 말을 중간에 끊을 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욕할 때
약속 안 지킬 때
...
그들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계속 됐다. 행여나 말할 기회를 놓칠세라 앞다투어 토해냈다. 응어리진 분노는 차고 넘쳤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곧 쉬는 시간 종이 울릴 것만 같았다.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정말 정말 화가 날 때는, 그 자리를 벗어나는 거야. 소피처럼 달리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화가 사라질 거야." 그때였다. 우리 반 민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툭 던졌다.
뭐라도 대답해줘야 할 것 같은데. 머리를 굴러봐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민수는 학기 초부터 툭하면 화를 퍼붓는 아이였다. 어찌나 화낼 일이 많은지, 민수가 지나갈 때마다 교실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여기서 펑, 저기서 펑!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 민수의 말은 마치, "화가 나면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통제 불가예요!"라는 항복의 말처럼 들렸다.
누구에게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민수 때문에 분통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옆 친구와 쉴 새 없이 떠드는 바람에, 지적할 때면 선생님한테도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민수였다. 그의 반항기 가득한 태도를 지켜볼 때면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애꿎은 탁자만 꽉 잡을 뿐이었다. 나 역시 화가 난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번도 화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다. 으레 화는 본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배설물쯤으로 여겼다. 화에 한 번 사로잡히면 그 강력한 힘이 우리 안의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지, 악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심지어는 주먹이 날아가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겉으로 화를 표출하지 않아도 화 때문에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심장은 오죽하랴. 초연하고 싶어도 화로 돌돌 감긴 경험은 계속 생각나게 마련이다. 소중한 내 시간을 화로 얼룩지게 만들고 싶지 않더라도.
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한데, 왜 화를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배우지 않았으니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모르는 건 당연하지 않나? 나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특히 화를 다스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작용이기에, 추상적인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화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다.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알아야 속 시원하게 민수에게 답변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책을 읽고 의문이 생길 때마다 주변의 심리상담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내가 화나는 순간도 관찰하고 기록했다. 감정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민수였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공부였다. 감정에 대해 알아갈수록 꼬였던 나의 문제가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메, 심 봤다!'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분노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체험한 바를 어떤 식으로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지도 큰 고민이었다. 도덕 교과서 같은 뻔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학생들의 마음에 잔물결도 남기지 않은 채, 곧바로 학생들 귀를 통과해 버릴 테니까. 불현듯 화가 날 때마다 게임에 참여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안내해 준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탄생한 그림책 <앵거게임>은 화를 잘 내는 법을 안내해 주는 판타지 그림책이다.
<앵거게임>은 내 안의 분노가 차오를 때마다 작동하는 게임이다. "화를 내며 공격하겠습니까?"라는 알림창이 뜨면, '네' 버튼을 누를지 '아니요' 버튼을 누를지 선택하면 된다. '네' 버튼을 콱 누를 때마다 아주 뾰족한 미사일이 나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상대방을 공격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 과연 주인공 서해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2년 전 <좋아서하는 그림책 연구회>에서 그림책 에세이 합평을 할 때였다. 내 글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었을 때, 마음 속에서 화가 마구마구 솟구쳐 올랐다.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난 것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음 속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화가 난 것을 상대방 탓으로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글을 정말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고 나자 마음 속 분노가 눈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분노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한동안 글을 단련하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이제는 성장과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제는 상대방의 무례한 말을 가려들을 수 있는 귀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교사로서 일하다 보면 때론 황당한 말을 들을 때도 있다. 다짜고짜 반말로 언성을 높이며 "네가 선생이야?"라는 말이 귀에 톡 날아든 날이었다. 그 말이 마음에 비수처럼 박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나는 단지 학교의 원칙을 알려드린 것 뿐인데. 억울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학부모의 충족되지 않는 욕구가 비난의 화살로 나에게 쏟아졌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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