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픈 사이(1)
남편은 참 미련할 정도로 자기 물건을 안 산다. 옷 한 벌 사면 10년이 넘어도 멀쩡하다며 그냥 입고 나간다.
그런 사람이 호기롭게 지갑을 열 때는 가족들 밥 먹을 때뿐이다. 평소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돈타령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의 모든 것은 늘 가족을 향해 있었다.
남편은 말이 없는 사람이다. 살면서 속 썩은 적은 없어도 속 터진 적은 셀 수 없이 많다.
2년 전 퇴직하면서 집에 있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그 무뚝뚝한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내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했다.
“나는 평생 나를 위해서 뭘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네.”
자기만의 책상 하나 가져본 적이 없다는 말에 속상하고 짠해서 당장 사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더니, 남편은 손사래를 쳤다
“책상 놔둘 자리도 없고, 사실은 거기 앉아서 할 일도 없어.”
내가 켜놓은 검색창을 들여다보며 책상을 구경하던 남편은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그렇게 또 남편은 자기 몫을 포기했다.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레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 달 수강료 16만 원.
며칠을 끙끙대며 고민하다 등록하더니, 어느덧 1년 반이 지났다.
수요일이면 집에 굴러다니는 에코가방에 어린이 바이엘 책을 넣고 집을 나선다.
눈에 띄게 실력이 늘진 않는다.
그러다 딸아이가 독립해 나간 빈 방에 큰 마음을 먹고 취미 공간을 만들었다.
여유 공간이 생기자, 또 몇 개월을 고민한 듯하다. 63만 원짜리 디지털 피아노를 그곳에 들여놓았다. 책상 하나 놓을 데 없다며 마음을 비웠던 남편으로서는 아주 큰 지출이었을 것이다.
예순둘의 남자는 학원에서 꾸중이라도 듣고 온 날은 평소보다 더 말수가 없어지고, 어쩌다 칭찬이라도 들은 날엔 괜히 피아노 곁을 서성이며 기분 좋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처음엔 도레미파솔도 더듬더듬 치더니, 요즘은 제법 양손을 놀린다.
물론 엄청 느리다.
초등학생들은 석 달이면 능숙하게 칠 곡을 남편은 아직도 붙잡고 있긴 하다.
지금 치는 곡은 ‘환희의 송가’.
목표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란다.
사실 나는 그 느릿느릿한 속도가 참 좋다. 자꾸 틀려서 멈추고, 틀린 자리에서 기어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건반을 누르는 그 답답한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술렁거린다.
지난 몇 년, 남편은 나 때문에 참 피 마르게 살았다. 무뚝뚝한 성격에 내색 한 번 안 했지만 직장 다니랴, 집안일하랴, 주말마다 요양원 달려오랴, 고생이 많았다.
무엇보다 내가 쏟아낸 독한 말들을 그는 어떻게 다 감당했을까.
항암의 고통은 사람을 한없이 바닥을 치게 만들었다. 치료의 부작용으로 코털마저 다 빠져버려, 의지와 상관없이 콧물이 줄줄 흐르는 내 모습이 사무치게 비참했던 날들.
그 초라함을 이기지 못해 나는 애꿎은 남편에게 성질을 부렸다.
"당신이 이 기분을 알아?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아냐고!"
난데없는 화풀이에도 남편은 눈빛 가득 억울함을 담고, 조용히 등을 돌려 나가곤 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의 절반은,
나의 날 선 가시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 시절을 묵묵히 견뎌준 남편의 몫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방 한구석,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남편의 시간이 참 고맙다.
누구를 살리려고 애쓰는 시간이 아니라서,
누구의 남편이나 아빠가 아니라 온전히 '남편 자신'으로만 보내는 시간 같아서.
월광 소나타를 언제쯤 연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런 날은 안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요즘 우리 집엔 툭하면 틀린 음이 울려 퍼지는데, 그 서툰 소리들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