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깨달은 기적
공사 기간 35일 중 18일이 지났다.
이제 17일만 버티면 된다.
20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
나는 매일 무릎 보호대를 차고 23층을 내려간다.
정오쯤 내려가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산책을 한다. 집에 가는 길, 간단한 장보기는 필수다. 장바구니엔 샐러드 채소,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봉지 정도만 담는다.
무나 사과처럼 무거운 것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달걀과 김은 미리 많이 비축해 두었다.
냉동실 제육볶음은 아직 넉넉하다, 이건 혹시나 공사기간이 길어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귀가는 1층부터 다시 시작이다. 관리사무소에서 2개 층마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놓아주었다.
나는 한 번에 4개 층, 컨디션이 좋으면 6개 층을 오른다.
호흡이 가빠지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30초 정도 쉰다.
창밖 풍경은 층수 높이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파트 화단만 보이던 풍경은 계단을 오를수록 넓고 푸른 하늘까지 시원하게 보여준다.
그동안 주야장천 엘리베이터만 주로 애정해 왔기에 몰랐는데, 20년 세월이 무색하게 깨끗한 계단에 놀랐다. 누군가의 노고를 늦게도 알았다.
16층쯤이었을까. 터질 듯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데, 아득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단순한 통증인 줄 알았던 그해, 내 척추를 짓누르던 것은 원발암에서 전이되어 온 암세포였다. 신경을 누르는 통증에 몇 초도 제 발로 서 있기 힘들었었다.
남편이 다급히 동주민센터에서 대여한 휠체어에 몸을 맡겨야 했던 날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시간들. 그때의 나는 다시는 내 발로 땅을 딛지 못할 줄 알았다.
방사선 치료는 몸에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나는 다시 두 발로 섰다. 그때는 기적이라며 감사했던 마음도 일상 속에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기억이 되살아난다. 23층을 내 다리로 오르내리며 느끼는 이 뻐근함이야말로 내가 간절히 바랐던 소원이었음을.
남은 17일, 나는 여전히 다른 이웃처럼 투덜대며 계단을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은 나만 아는 신나는 노래다. 건강해진 다리로 계단을 오르는 행복의 노래.
이 깨달음을 또 잊으면 정말 바보라고, 나는 내 머리를 쿵 쥐어박으며 23층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