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픈 사이(3)
나의 암 진단은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취업 준비로 초조해하던 시기에 찾아왔다.
사랑받는 일에만 익숙했던 스물네 살의 아이는 날벼락같은 현실 앞에서 빠르게 어른이 되어갔다.
남편과 딸은 서로 스케줄을 맞춰가며 나의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의 든든한 동행인이 되어주었다.
기력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는 날이면 딸은 나를 차에 태워 교외의 카페로 향했다.
엄마에게는 바람을 쐬어주고, 본인은 그 옆에서 노트북을 펴고 입사 시험을 준비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양평으로, 가평으로 콧바람을 쐬어준 것도 딸이었다.
영원한 아기일 줄만 알았던 딸이 어느새 나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사실 너는 한참 뛰어놀아야 할 어린 시절 몇 년을 이미 혹독하게 아팠던 아이였다. 그 힘든 시간을 작은 몸으로 꿋꿋이 이겨내고,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때론 까칠할 만큼 주관이 뚜렷한 어른으로 자라나 내 곁을 지켜준 너였다.
치료의 큰 고비를 넘긴 어느 날, 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 나 며칠만 여행 다녀올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딸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스스로 돌볼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내 병이 아이의 앞길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마음 한편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 후, 네가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누군가가 ‘아픈 엄마를 두고 철없는 아이’라며 내 마음에 상처를 냈다.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조용히 그 지인과 거리를 두는 쪽을 택했다.
설령 누군가 이를 비뚤어진 모정이라 부른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만의 잣대로 타인의 삶을 쉽게 재단하는 무례함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아픈 와중에도 꿋꿋이 제 앞가림을 고민하던 딸은, 결국 본인이 원하던 곳에 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직장 생활이 수월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했다고 잔소리까지 졸업한 건 아니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 집 ‘K-장녀’는 이제 헬리콥터 맘이라도 된 듯, 초로에 접어든 엄마 아빠를 원격 조종한다.
“엄마, 산책했어요? 집에만 있으면 안 돼요.”
“아빠, TV 너무 많이 보는 거 같은데?”
딸이 쓰던 방은 이제 나의 취미방이 되었고, 한쪽에는 남편의 피아노를 놓았다.
딸은 자기의 삶으로, 남편은 자기의 취미로.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며 아팠던 시간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