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뽑아주실 분?

by 무심

요즘 나는 당근에서 운영하는 아파트 커뮤니티에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머물곤 한다.

주소를 인증해야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이곳은 우리 아파트의 작은 공론장이다.

하지만 올라오는 소식은 대개 팍팍하다. 층간소음, 흡연, 주차 문제 같은 갈등이 게시판의 주류를 이룬다. 최근에는 거주민 간 세대 갈등까지 화두로 떠올랐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글들이 많지만, 아파트 돌아가는 속사정을 알기 위해 알람이 울릴 때마다 앱을 켠다.

가끔은 맛집을 묻는 신규 입주민에게 내가 아는 장소들을 알려주며 작은 보람을 찾기도 한다.


어제 오후, 평소와 다른 결의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짧지만 눈길을 끄는 구인 글이었다.

“흰머리 10개쯤 뽑아주실 분 있나요? 뒷머리라 혼자 뽑기가 힘드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 하나가 달렸다.

“비용은 얼마인가요?”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것 같아요. 만 원 드릴게요.”

흥미롭긴 했지만 내 관심사는 아니었기에 곧 창을 닫았다.

‘1인 가구인가?’ 하는 궁금증과 ‘흰머리카락 뽑는 일까지 돈으로 해결하는 시대가 됐네’ 정도의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오늘 아침, 그 글에 다시 알람이 울렸다. 그사이 1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흰머리는 뽑으면 더 번져요. 차라리 그 돈으로 염색을 하시는 게….”

누군가의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런데 원글 작성자가 남긴 답글 한 줄에 시선이 머물렀다.

“얼마 전에 머리 수술을 해서 염색을 못 해요.”

수술 자국이 아물지 않아 염색약조차 닿을 수 없는 사정. 그럼에도 외모를 정갈하게 유지하고 싶은 간절함이 행간에서 읽혔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닉네임은 ‘오렌지소녀’였다.

“제가 공짜로 해드릴게요.”

흰머리 주민은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그럼 제가 소녀님이 사시는 동 앞으로 갈게요. 언제 시간 되세요?”

“오후 2~3시 아니면, 그 이후엔 밤 9시 넘어야 돼요!”

밝고 상큼한 닉네임을 꼭 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중학생일까, 혹은 갓 성인이 된 대학생일까?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약속 장소를 상의했다. 놀이터 근처 벤치쯤에서 만나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이어졌다.


채팅창을 지켜보던 내 마음이 환해졌다.

내 정수리에 돋아난 흰머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듯 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타인의 상처를 문장 사이에서 읽어내고 선뜻 ‘공짜’ 제안을 하는 소녀의 다정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이 아직 살 만한 이유는 거창한 정의감이 아니라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한 인간애가 아닐까.

'오렌지소녀'가 다정한 마음을 다치지 않고,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니,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누군가일 수도 있겠다.


앞으로는 아파트 단지를 걷다가 문득문득, 유심히 주변의 따뜻한 이웃들을 눈여겨보는 습관이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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