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imjae
아버지의 약장
멀리 보이는 옛 집에 불빛 맑다. 때 묻은 기억들은 석유 냄새만큼
짙고 찬데
그 집이 이젠 우리 집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뒷골목으로 빠져나가 어둠에 묻힌 논둑길로 나를 잡아끌었다
따뜻했던 옛집의 불빛이 멀어져 가고 오늘밤은
논둑길이 유독 어둡다
달빛이
금 간 유리창에, 내 눈두덩에, 가슴에,
청정맥 불거진 손등에도 꽂힌다
나, 눈뜨고 누워서 창자가 비어 가는 기척을 듣는다
창 밑에 웅크린 어머니도 속이 빈 어미 곰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고 있다
몇 해째 겨울잠이 깊은 저 어둠의 덩어리
굽은 그녀의 등 뒤로 아버지의 약장이 보이고
내 어린 날의, 아침빛에 빛나던 색색의 약병들이 가지런하고
저만큼 걷고 있는 아버지의 좁은 등 뒤에서 와르르 한 생이
부서졌듯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둥근 어머니의 뒷등에 꽂힌다
나, 중년의 골 패인 등허리에도 날선 유리조각 몇 개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