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무엇인가를 순탄하게 얻어 본 적이 없었다. 시행착오 끝에 언제나 길을 멀리 돌아가야 했고, 깨지고 부딪치는 과정은 당연한 삶의 부분 집합이었으며 실패로 인해 우울증까지 겪었다.평생 따르지 않는 운을 성실함으로 꾸역꾸역 메꾸면서 평타 인생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맞다. 난 그리 운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의 초반부에 불운의 총량을 다 채운 것인지,중반부 도입 시점에서 출간운이 따라주기 시작했다. 어떤 형태의 운이든 간에 낯선 무언가가 물밀듯 들어오다니내것이 아닌 것 같았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책으로 출간도 하고 있으니 꿈을 꾸는 듯하다.
"책 원고 마감하시고 연락 주세요. 기다릴게요."
네 번째 계약한 어학 학습서는 초고만큼이나 오랜 1교 (첫 번째 교열 교정)의 시간이 걸렸다. 작년 상반기, 몸이 너무 아팠던 터라 빠른 작업이 불가했고, 편집장님의 추가 요청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기간이 지체되었다. 계약된 원고 작업의 1교가 완료된 후, 타 출판사의 편집장님과 부랴부랴 미팅을 가졌다. 송구하게 기다려 주신다는 말까지 해주셨는데 원고 마감의 속도가더뎌져서 죄송한 마음에 작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연락을 드렸다.언제나 우리의 만남은 강남 교보문고다. 오랜만에 얼굴을 뵈어 반갑다. 이미두 차례 작업을 함께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쌓인 것 같다. 본격적으로 기획한 책에 대한 미팅이 시작되었다. 편집장님께서 유선상으로 영어 필사책을 다른 기획으로 제작해 볼 의중을 전달해 주셨기에 이것저것 나의 생각들도 풀어놓았다. 영소설 한권을 통으로 넣기를 원하셨고, 그 첫 번째 책으로 <어린 왕자>가편집장님의 간택을 받았다.
"다른 한 권은 작가님이 원하는 책 하나로 골라주세요."
편집장님은 언제나 깍듯하게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신다. 아직도 민망스럽게 나의 입 끝에서는 매끄럽게 넘어가지 않는 호칭이다. 넘어온 선택권에 주저 없이 <빨간 머리 앤>을 외쳤다. 의사결정에 주도면밀한 연구와 자료 검색 보다 개인적인 선호도가 앞선 듯 하지만 두 권 모두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고전이니 말해 무엇하랴. 편집장님이 1권, 내가 1권, 책이 되어갈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사랑 어린왕자, 그리고 어린 왕자 못지않게 매력적인 고아 소녀는 이렇게 나의 손안에 들어와 마음을 흔들었다.
편집장님께서는 <어린 왕자>와 <빨간 머리 앤>의 만남, 두 책의 스페셜 에디션까지 고려하시며 진행에 열의를 보여 주신다. 원래 두 권의 책을 계약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출판사를 중간에 끼지 않고 쉬엄쉬엄 혼자 만들어 보려 했던 책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그랬더니 그것까지 같이 함께 하자시며 순식간에 3권의 책 계약이 이루어졌다.아, 눈앞에 일이 놓이게 되면 또 질주할 텐데... 그냥 말씀드리지 않고 천천히 내 속도에 맞게 진행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몰려왔지만, 예쁘게 책을 잘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숨 고르기를 하며 달려보기로 했다.
시중에 이미 어린 왕자 영어 필사책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래서 살짝 주저했는데 편집장님께서는,
"우리 출판사만의 스타일로 예쁘게 만들면 되죠!"
하시며 의욕을 보이셨다. 어떤 식으로 다른 책을 만들어 내야 할까?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기획부터 내용까지 전적으로 모든 것이 나에게 맡겨진 책임감이 무거웠기에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A long walk to water>, <My name was Kyoko>, <The old man and the sea>, <The color of my words>, <Oh, the places you'll go>등 영어 원서를 매일 새벽마다 혼자서 조금씩 읽고, 필사하고, 글을 쓰며, 언어와 문화의 샛길 정보를 찾아 앎의 확장으로이어져 행복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나의 즐거웠던 원서 읽기와 필사의 경험을 나누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포인트 있는 본문을 필사하고 조금이라도 글을 끄적여 볼 수 있는 성찰 질문을 넣으면 어떨까. 평소 문화 수업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문화적 코드의 배경지식도 넣어 보면 어떨까. 책과 관련된 주변 이야기를 포함시키면 재미와 이해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분주한 일상 속에서 텍스트 전체를 필사하지 못하면, 주요 문장 하나라도 필사할 수 있도록 부록의 형태로 포함시키면 어떨까.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전적으로 재량권을 주신 덕분에 자유롭게 생각을 뽑아내다보니 어느덧 책의 모양새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이전 책의 시리즈물이라는 향기를 더하기 위해 100일 필사로 방향을 잡고, 주요 텍스트 100개만 추려 내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서 통필사가 아닌, 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주요 본문만 추려 낸다면 다른 영어 필사책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책이 탄생할 듯했다.
문제는 분량이었다. 어린 왕자는 책 자체가 얇아서 본문 발췌 작업의 난도가 높지 않은 반면, 빨간 머리 앤은 원서의 두께감 때문에 어디서부터 골라내야 할지 막막했다.망망대해에서 월척만을 골라 낚아야 하는 선별 작업을 위해 원서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신기한 것은,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울림을 주어 곱씹고 넣고 빼고의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기준을 잡아야 했다. 빨간 머리 앤의 입에서 나오는 주옥같은 인생 명언이 녹아있는 장면을 정리할 것, 주요 사건들을 모을 것, 책에 담지 못해 줄거리 공백이 생기는 부분은 추가적인 이음새를 넣을 것. 이를 통해 전체 소설의 흐름을 매끄럽게 따라가면서도 아름다운 장면들을 놓치지 않도록 구성했다. 생각보다 더디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워낙 좋아하는 책이라 모든 순간순간이 즐거웠다.
<어린왕자>는 출간이 되었고 감사하게 판매지수가 꾸준하게 상승세를 타고있다. 물론, 변동이 있겠지만 3개월 만에 베스트셀러 딱지도 달아보고, 이것이 출간발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기쁘다. 차별화된 기획이 시장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빨간머리 앤>은 원고 마감후, 표지 디자인 시안까지 나왔다. 곧 출간될 예정의 책을 기다리며 오늘도 꿈결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