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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tudio Jan 27. 2018

"프라하에 오래 머물면 우울해져."

프라하 이야기 - 2

오빠에게.


안녕, 오빠.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오빠. 잠깐 스친 현장에서 오빠를 만났고, 그때 난 '언젠간 프라하에 갈 거야.'란 마음으로 한창 들떠 있었지. 프라하에 얼마나 머물 거냐는 질문에, 글세, 2주 정도 머물 생각이야.라고 답했잖아. 오빠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어.


"프라하에 오래 머물면 우울해져. 내가 몇 달 거기서 살아봤는데, 해 뜨는 날이 얼마 없어. 날씨가 계속 흐리니까 사람이 우울해지더라고. 난 프라하 오래 머무는 거 비추."


난 프라하에 2주 동안 머물었어. 이제 벌써 재작년이 되었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 한국을 떠나, 24시간이 꼬박 지났는데도 여전히 2월 29일인 프라하에 도착했지. 눈이 엄청 와서 비행기가 연착되었어.

눈 쌓인 고요하고 묵직한 밤.

이게 프라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야. Malostranska역 앞에서 담배를 태우던 두 체코인 언니의,


"Welcome, Praha."


친절하고 건조한 음성이 여기가 진짜 프라하라고 말해주더라. 프라하 어때? 우울하지 않아?라고 오빠가 묻는다면. 글세, 차분하고 묵직하고 고요한 게 우울한 거면, 그렇다고 답할게.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 포인트를 제외하고 내가 느낀 프라하의 분위기는 그랬던 같아. 하나. 사이렌 소리가 하루 종일 어디서든 들리더라. 경찰차에서 나는 소리인지, 엠뷸런스에 나는 소리인지, 그건 잘 모르겠어. 여하튼, 고요를 깨는 건 사이렌 소리더라고.


프라하의 눈꽃나무


둘째 날은 비가 왔어. 영화에서 유럽 사람들은 비 와도 우산을 쓰지 않던데, 여기도 그랬어. 그래서 나도 머플러로 대충 정수리만 가리고 비를 맞으면서 걸었어. 비가 와서 도시 색이 더 짙어졌어. 완전 럭키. 눈 내린 프라하, 비 내린 프라하를 모두 느끼고 갈 수 있다니!


날씨가 어두우니, 기분도 같이 가라앉았던 건 사실이야. 근데 우울하다기보단, 프라하가 삶의 일부분처럼 느껴졌어. 잠깐의 여행지가 아니라, 마치 내 일부처럼 느껴진 거야. 자연스럽게 프라하의 삶 속으로 들어간 느낌. 그래서 낯설지가 않았어. 난생처음 오는 나라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거지. 언젠가 와보았던 곳, 앞으로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곳처럼 느껴진 거야.


오빠. 난 사실 여행에 대한 로망이 별로 없던 사람이야. 왜냐하면 여행에서 느낄 행복감보다 여행 후 느낄 무력감이 더 두려웠거든. 여행 가서 실컷 재미있게 놀고 오면 뭐하나, 현실은 똑같고 전보다 더 지옥처럼 느껴질 텐데. 들뜬 기분으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벌컥 열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질 현실. 절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떠나지도 않고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럴 바엔 아예 여행 따위는 가지도 말자. 절망에 익숙해지면 절망도 나름 일상이 될 테야. 그렇게 난 여행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 되었어. '진짜' 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쭉 그런 생각으로 살았어.


여행을 떠나기 전 고민하고 있을 때, 상담 선생님이 본인이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꺼내셨어. 그리고 나에게 기억에 남는 여행이나, 장면이 있냐고 물으셨지. 여행은 아니지만, 촬영차 갔던 황매산에서 맞은 새벽녘이 떠올랐어. 밤씬이어서 해가 뜨기 직전까지 촬영을 했어. 날이 밝아오자 모두들 짐 챙기기 바빴지. 나도 그랬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탄성이 들려오는 거야. 우-와. 하고. 그래서 나도 고개를 들었어. 세상에. 오빠. 우리는 산 정상에 있었는데, 구름이, 글세, 눈 앞에 좌악 깔려있는 거야! 풍성하고 고르게 펴진 구름 떼가 우리 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어. 마치 밤새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를 마중해주려고 오는 거 같았어. 장관. 이런 광경을 볼 때 쓰는 말이더라. 넋을 놓고 봤어. 그날 내가 본 풍경을 선생님에게 아주 생생하게 전달했지.


"부영씨, 여행이 주는 선물이 이런 거예요.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나죠? 살다가 힘이 들거나 지칠 때 사진을 꺼내 보듯이 그날 보았던 풍경을 눈 앞에 떠올려보는 거예요. 그리고 작은 힘을 얻는 거죠. 부영씨 지금 엄청 들떠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여행이 그래요. 여행 꼭 다녀와요."     


사랑하는 블타바 강가, 해질녘

    

프라하 날씨는 우중충해. 인정할게. 여행 삼일째까지 눈 오고 비 오고의 연속이었으니 말 다했지. 근데 우울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심지어 프라하는 이런 날씨랑 찰떡궁합이야. 운치 넘치거든. 덕분에 난 차분하게 프라하를 둘러보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어. 그래. 한 달 넘게 살면 우울해질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 그러니까 사흘째 아침 눈을 떴는데말야.


반짝 반짝 빛나는 블타바 강


해를 보니까 기분이 좋긴 좋더라! 한국에서는 늘 해를 봐서 감사한 줄 몰랐어. 선글라스 챙겨서 밖으로 나와 걷는데 온기가 느껴졌어. 이 날은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으면서 산책했어. 햇빛에 대한 감사를 드리며.


오빠.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오빠. 잠깐 스치듯 만난 오빠. 프라하 날씨에 대해 생각하다가 오빠 생각이 나서 편지를 썼어. 오빠는 몇 달 동안 이 도시에 머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하루하루를 보냈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어떤 경험들이 오빠로 하여금 '프라하에 오래 머물면 우울해져.'라는 말을 하게 만들었을까? 오빠랑 프라하 만 알겠지.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까. 나랑 프라하의 2주는 딱 좋았어.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잊을 수는 없는 정도로. 들뜨고 설레기만 한 여행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머물다 온 느낌이야. 트렁크를 끌고 한국에 있는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젖혔을 때, 절망이 아니라 따뜻한 일상이 날 기다리고 있더라! 가슴속에 프라하가 남긴 사진 여러 장을 꺼내 엄마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해 주었어. 나 이제 여행 좋아. 진짜 좋아. 또 갈 거야. 프라하도 다시 갈 거고. 오빠는 안 가겠지만. 그럼 안녕히 :-)  


볕 가득, TRI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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