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인간을 결코 속이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은 항상 우리다
Nature never deceives us;
it is always we who deceive ourselves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문명사회를 둘러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철학자입니다. 그는 이 문장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간 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날카롭게 통찰하였습니다. 그의 이 말은 단순한 자연예찬이나 회의적인 인간관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는 심리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1. 자연은 인간을 결코 속이지 않는다
루소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규칙과 제도에 의해 구속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둘러보면, 법과 규칙, 도덕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오히려 불평등과 불신의 원인이 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합니다.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법은 권력의 도구가 되고, 도덕은 위선으로 포장되며, 규칙은 형식적인 구속으로 전락해 사람들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거짓과 기만에 점점 익숙해지고,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조차 혼란스러워지곤 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연의 개념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소가 말한 ‘자연’은 단지 숲이나 강, 하늘처럼 물리적인 환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본래 모습, 가공되지 않은 감성, 조건 없는 관계, 그리고 생의 가장 기본적인 리듬을 의미합니다.
어원적으로도 ‘nascor(태어나다)’에서 비롯된 자연은, 인간 존재의 출발점이자 가장 순수한 상태로의 회귀를 뜻합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스스로 그러한 상태, 즉 인위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리키며, 이는 균형과 조화, 신뢰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자연스러움’은 진정성(truthfulness)의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얼굴, 표정, 말투, 몸짓, 그리고 감정 표현과 관계 형성까지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개 심리적인 신뢰가 싹트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러움은 억지나 연출 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며, 그 상태는 오히려 가장 건강하고 안정적인 인간 관계의 토대가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연을 본능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품고 살아갑니다.
2.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은 항상 우리다
그렇다면 루소가 왜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은 항상 우리다”라고 말했을까요?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불평등이 단지 제도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자체에 내재된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연약한 존재였으며, 생존을 위해 자연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협력과 경쟁이 생기고, 점차 공동체가 만들어지며 재산의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재산은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만들어냈습니다.
루소는 인간 사회의 구조를 인체에 비유하며, 누군가는 머리의 역할을, 누군가는 손발의 역할을 하게 되는 불가피한 불균형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이런 구조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불균형이 자연의 연장선이라면, 그것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더 나은 균형과 정당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왕’이란 존재도 타고난 지배자가 아닌,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머리 역할’을 위임받은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으며, 힘에 기반한 지배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권력의 한계와 정당성을 분명히 하려는 시도이자,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문명’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문명화되기 전, 자연 상태에서는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지배나 종속, 착취나 자비 같은 사회적 관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연적인 감성, 즉 타인과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마음은 공동체에 이롭게 작용한다고 보았고, 오히려 이성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들며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성은
공동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이끌지만
이성은 이기심을 부추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이성이 아닌 오로지 감성만을 따라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갑니다. 정보와 기술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는 대부분의 결정을 ‘이성적으로’ 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본질은 감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감성은 우리의 신뢰, 관계, 공감, 동기부여와 같은 삶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메타인지라는 개념을 통해, 이성으로 살아가는 나와 감성으로 살아가는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상황에 맞는 전략적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는 감성이 더 순수한 기준이었다면, 지금 우리는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인식하고 조율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루소의 말은 단순히 ‘감성만을 따르라’는 권유가 아니라, ‘본래의 자신을 돌아보라’는 철학적 물음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믿는 신념이 정말 내 안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기준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결국 우리가 속고 있는 건 사회나 타인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위장된 자아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현대사회 속에서 얼마나 이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얼마나 감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루소의 시대보다 훨씬 복잡하고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는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루소가 말한 ‘자연’은 지금 이 순간 더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