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겨울엔
하얀 눈이 있어 좋습니다.

춘천의 겨울이 좋은 이유 @ 공지천, 의암공원

by Display


오늘 춘천에는 눈이 왔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아침 뉴스 앵커가 분명 춘천에는 눈이 조금만 내린다고 했는데,

점심 먹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지를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오후에는 눈 구경하러 다녀왔어요.


패딩을 입고 장갑을 끼고 발목까지 오는 겨울 신발도 신고, 집을 나섰어요.

아참, 그런데 추울까 봐 꺼내 둔 핫팩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두고 나와 버렸네요.

다시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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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산책로에 눈이 펑펑 내려 온통 흰색으로 물들었어요.

이 산책로의 단풍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쌓이니 가을 기억마저도 하얘져 버렸네요.


산책로에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차가운 공지천을 유유자적 헤엄치는 오리들이 더 많더라고요.

얼마나 추울까 걱정했는데 평소보다 움직임이 활발한 거 보면 오리도 눈이 내리니 좋은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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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에는 좋아하는 시를 생각해 봅니다.

윤동주 시인은 눈을 보고 마음속에 지도를 하나 그렸어요.

시인은 눈이 녹으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난 순이의 자리마다 꽃이 필 거라고 했어요.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내내 마음에는 눈이 내릴 거래요.


네 쪼고만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지도>


2018년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12월의 고요한 오후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잠시 다독여주듯

순이를 향한 시인의 순정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고민도, 슬픔도,

그대로 잠시 멈춘 채 마음을 다독여봅니다.


발길을 옮기니

점점 더 큰 눈이 내립니다.


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오후. 큰 눈이 내리는 춘천 공지천 산책로.


잠시 산책로에 서서 눈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눈을 흠뻑 맞은 적이 언제였는지. 제법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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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國境の長い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あった。
夜の底が白くなった。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길고 어두운 공지천 눈숲을 지나면

눈부신 태양이 나오고, 밑바닥까지 하얀 의암호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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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호를 따라 언덕에 오릅니다.

몸이 점점 따뜻해집니다.

며칠째 매섭게 불던 북극발 바람도 잠시 쉬어가나 봅니다.

바람도 눈처럼 포근합니다.


제게는,

매년 함박눈이 내릴 때 즈음에 꼭 찾아보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영화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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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알게 되고 나서, 저는 일본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전공을 일본어로 선택하는 계기가 되기까지 했어요.

그만큼 지금도 제 가슴속 깊숙이 남아있는 영화예요.


올해도 겨울 솜이불을 꺼낼 때 즈음에 이미 다시 한번 봤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에는

이 영화가 그저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봤더니

히로코의 마음속 수많은 원망과 그리움을 느끼게 되었어요.

히로코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겨울이었을까요.


저는 내년 겨울에도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볼 것 같아요.

그대에게도 눈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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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몸을 녹이면서

눈이 온다고 A에게 연락을 했어요.


눈이 부시다.

세상이 하얗다.

그래서 너무 신나고 근사하다고.


이 광경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

내가 아주 혼자이지 않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도 함께 춘천에 있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하얀 겨울날의 오후,

서로가 건네는 따스한 안부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따뜻한 어묵탕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거기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하면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춘천의 겨울엔

하얀 눈이 있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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