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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Jul 02. 2024

아버지의 노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돌이 얹힌 듯 무겁고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딸이니까 이해하시겠지, 나중에 잘해드리면 되지 뭐, 하는 마음으로 안이하게 있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4남 1녀의 외동딸이었던 나는 집안 식구의 귀여움을 온통 독차지하며 자랐다. 기술자 몇을 두고 가구점을 하던 우리 집에 내가 태어나고부터 운이 트였는지, 주문이 밀려들었고 새벽까지 불을 밝혀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술자 수도 늘어났고 살림은 풍족해져 갔다.

 아버지는 유난히 나를 예뻐하셨다. 어디서 귀한 게 들어와도 나부터 찾고, 예쁜 옷, 예쁜 구두를 수시로 사 오시곤 했다.

 예닐곱 살 때부터는 내 손을 잡고 극장에 다니셨다. TV가 없던 그 시절에 영화는 절대 강자의 힘으로 다가왔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고 때론 웃음을 터트리며 영화에 몰입했다.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가 사주시는 고구마 강정과 만두를 먹는 맛도 손꼽아 기다리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내가 다리 아프다고 징징대면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걸었다. 나는 아버지의 등위에서 잠이 들곤 했다.


 아버지 얼굴에는 혹이 있었다. 검붉은 혹은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아버지의 한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집을 혹보네 농방이라 불렀다. 동네 어른들을 만나 인사를 하면 ‘허허! 혹보 딸이로구먼!’ 하는 것도 싫고 창피했다.

  "하필이면 왜 혹보네 농방이에요? 다른 이름도 많은데……."

  "그래도 이 혹이 너를 학교 보내주고 밥 먹여주는 혹이다. 허허허."

  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 아버지는 혹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그 당시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가야 했는데, 학교에서는 밤늦도록 시험공부를 시켰다. 저녁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따끈한 도시락을 싸 온 학부모들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전되어 우리는 촛불을 켜고 공부하고 있었다.

 저녁 도시락을 가지러 캄캄한 밖으로 나가던 아이 중 하나가 갑자기 아악! 기겁하며 뛰어 들어왔다. 밖에 괴물이 서 있다고 소리치는 그 아이 말에 우리 교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옆 반 아이들까지 놀라 소동을 피웠다.

 불이 켜지고 밖에 나가본 나는, 그 소동이 우리 아버지 때문이었음을 알고 아버지께  화를 냈다.

 “왜 아버지가 도시락을 갖고 왔어!”

 난 소리 지르며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는 내 머리 위로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쏟아졌고,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 들어가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락을 들고 서 있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가셨다. 아버지 발걸음이 쓸쓸했으리라는 것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여고 다닐 때였을 것이다.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를 만났다.

 '이제 오니?' 하며 웃는 아버지를 난 모른 체하고 말았다. 친구들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옆집 아저씨라며 얼버무렸다. 자신을 자책했지만, 그보다 아버지 얼굴의 혹이 더 창피했다. 못 본 체한 딸에게 아무 말 없이 지나가던 아버지.

 그날 저녁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내 딴에는 아버지에게 사과하고,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동네 어귀로 접어들자, 당산나무가 나타났다. 당산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울창한 잎사귀는 마치 유령이 팔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희미한 달빛이 새어드는 당산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께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도한 기다림이었지만, 너무도 적막한 밤공기와 으스스한 분위기로 소름이 돋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축축한 밤바람을 가르며 들려왔다. 며칠 전, 무당이 내가 앉은 그 자리에서 칼춤을 추며 무당굿을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를 덮칠 것만 같아 머리가 쭈뼛해졌다. 순간 발딱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날 밤늦게 술을 드시고 오신 아버지는 '한 많은 대동강아'라는 아버지의 애창곡을 부르셨다.

 ‘한 마않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자알 있느냐아. 모란봉아 을밀대야 내 모양이 그으립구나. 철조망이 가로오 막혀…….’

 아버지는 ‘철조망이 가로오 막혀’ 부분을 유난히 애달프게 불렀다.

 그 당시 오빠와 나는 아버지의 노래를 하도 들어서 가사를 다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 ‘철조망이 가로오 막혀’ 부분을 장난스럽게 따라 부르며 깔깔거리곤 했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노랫소리는 유난히 애달프게 들렸다. 난 너무 졸려서 아버지께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에 갔을 때였다.

 서울 집에 가기 위해 문밖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유난히 애틋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딸 이제 언제 또 볼까?"

 나는 그 말을 무심히 그냥 흘려듣고 평소처럼 웃으며 아버지께 손을 흔들었다. 한참을 가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니 그때까지 집 앞에서 손을 흔들고 계시던 아버지. 그것이 아버지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모습,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우며 하염없는 사랑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나의 편협함과 이기심은 그 사랑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기억 저편에서 아버지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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