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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Jul 05. 2024

첫사랑

  

 그 시절엔 모든 것이 재미없고 시시하게만 보였다. 방에 틀어박혀 하이네의 시를 책장이 닳도록 읽었던 때였다. 비가 오면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뭔지도 모를 인생에 대해 고민도 했다.

 여고 1학년, 새 교실에서 만난 낯선 아이들은 선생님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재잘대는 참새들의 수업에 나타난 과학 선생님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상치 않은 뜻밖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선생님 얼굴은 왠지 모를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가끔 살짝 찡그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나는 선생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채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로 걸어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솟아 나왔다.


 그 후로 난 과학 시간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과학 수업이 없는 날이면, 선생님이 보고 싶어 그가 담임을 맡은 반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과학 수업이 있는 날이면, 유난히 내 옷매무새와 머리에 신경을 썼고, 수시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선생님은 책상과 책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수업을 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선생님이 내 옆자리에 오래 서서 수업하는 것이다.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 산뜻한 향기가 났다.

 ‘내 마음을 알아버렸을까? 그렇다면 선생님도 나를?’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선생님도 나를 좋아하길 바랐다.   

  

 중간고사 시험이 다가왔다. 전날 밤늦도록 과학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건만, 과학시험지를 받아든 나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시험지엔 온통 그의 얼굴이 빙글거리며 돌아다녔다. 결국 시험 성적은 엉망이 되었고, 선생님은 성적순대로 아이들 손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녀석, 성적이 왜 이래!”

 손바닥의 아픔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깊은 수치심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가 내리치는 치욕스러움을 감수했다. 무정한 그가 미웠고, 야속했다.


 이후로 이를 악물고 과학 공부에 매달렸다. 아이들이 지겨워하던 화학 공식을 수첩에 적어 길을 걸어가면서도 외웠다. 예습 복습은 물론이고 수업 시간엔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여름이 왔다. 7월의 한 낮은 뜨거웠지만, 물을 머금은 나무들은 푸른 생명력을 과시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난 날, 시험은 잘 치른 것 같은데 결과가 궁금했다. 다음날 선생님은 나를 불러내더니 과학점수 전교 1등이라고 했다. 아이들 앞에서 과학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유난히 하늘이 푸르다고 느껴지던 어느 가을날, 학교 앞길의 코스모스는 기다란 목을 내밀고 하늘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뒤늦게야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니? 타라, 데려다줄게.”

 투명한 햇살 속에 자전거를 탄 그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지만 머뭇거리며 그의 등 뒤에 올라탔다.

 “꼭 잡아라. 달린다.”

 그의 허리를 꼭 잡은 내 가슴은 세게 방망이질을 했다. 그에게 내 마음을 들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기분이었다.

 ‘이대로 세상 끝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도 잠시, 동네 어귀에 날 내려주고 선생님은 갔다. 나는 그가 멀어져 가는 길목을 오랫동안 서서 지켜보았다. 서편 하늘의 노을은 가슴이 짠하도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일기장에 나는 ‘그의 자전거를 탔다. 그의 허리를 꼭 잡았던 순간 너무 행복했다.’라고 썼다.

 나는 귀중한 보물을 가슴 깊이 몰래 간직한 채 누구에게 들킬세라 살짝살짝 꺼내 보듯, 그를 그리워했다. 그때쯤 나는 어디선가 항상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지냈다. 학교에서도 그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친구들과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떠들고 웃곤 했다.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몇 명의 아이들과 청소하고 있었다.

 “과학 선생님 가신다.”

 한 아이가 창밖을 보며 소리쳤다. 나는 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선생님의 자전거엔 어떤 여자가 그의 허리를 꼭 잡은 채 웃고 있었고, 앞자리엔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정말 예뻤고, 자전거 아래로 보이는 쭉 뻗은 다리맵시가 유난히 돋보였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교정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별이 아우성치며 떨어지는 환각을 느끼며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빛나다가 허무 속으로 사라져간 나의 사랑은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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