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만나는 작은 여행

by 다섯시의남자

여행 중 만나는 작은 여행




겨울옷을 챙기고 읽을 책과 노트북을 넣어 가볍게 가방을 꾸린다.

마닐라에서 대구에 있는 차가운 집을 거쳐 후쿠오카로 들어간다.

두 달 동안 틀지 않았던 보일러가 집구석까지 돌아 비로소 내 발바닥까지 미지근함을 가져오기까지 외투를 입은 채 TV를 틀고 화분과 안부를 묻고 이방 저방을 기웃거린다.

그리고 후쿠오카로 배를 타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 사실 후쿠오카로 떠나는 여행이라기보다 배를 타기 위한 여행이라 해야겠다.


여행자는 돌아갈 곳이 있는 자이다.

3박 정도만 한 숙소에 머물더라도 공간에 대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익숙하고 편안해진다. 여행은 삶 가운데 ‘안전’을 벗어나 ‘위험하고 불편한’자리로 일부러 찾아가려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주, 편안함을 떠나 내가 지금 여행자의 신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 부족해 봐야 잠시 불편할 뿐. 그렇게 보장되지 않는 불편함을 안고 떠나고 또 돌아온다.


배는 추억하던 그 모습대로 여전하다. 크루즈를 꿈꾸는 페리라고 하지만 곳곳이 뭉뚱하고 투박하다. 세련되지 않은 순박함이 오히려 좋다. 더 편하다.

바람이 세고 파도가 다소 거칠지만 갑판에 서서 까만 바다와 마주한다. 5분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머리가 차분해지고 문제들이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마법 같은 순간이 나를 새롭게 돌려세운다. 삶에 지쳤다면 여기만큼 완벽한 회복실은 없을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기다림이다.

어쩌면 ‘기다림’이 여행일지도 모른다. 배낭을 메고 하는 일이라고는 어딘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닐까.

이렇게 큰 배도 망망대해 위에서는 그저 위태로운 조각일 뿐이다.

책을 펴보지만 글이 머리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창밖 거대한 바다에 자꾸 이끌린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고 바다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카타역 앞 비즈니스호텔을 잡았다. 아침 일찍 오호리공원에서 잠시 산책을 하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물오리 가족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커피를 마신다. 아침부터 호수 주변을 달리는 사람들과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3박 4일의 일정을 어찌 채울까 그제야 고민한다.

따뜻한 마닐라에서 왔으니 눈이라도 보면 좋겠지만 후쿠오카는 눈다운 눈을 만나기 어려운 동네다.

이번 해에는 겨울이 없다. 길이 엇갈렸다, 다시 돌아 다음에 만나기 되겠지만 반가울지 감당 못 할 추위에 낯설지 모를 일이다.



일본에 도착하면 찾게 되는 자판기 밀크티.

달달한 한 끼 규동.

숙소에 돌아가기 전 라멘.

내가 살고 있는 마닐라에도 다 있는 것들이다. 빌리지 바로 앞 가게에도 그 밀크티가 있고, 쇼핑몰에 가면 필리핀 음식점보다 더 많은 일본 식당이 즐비하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만을 두고 얘기하지 않는다. 주변 풍경이나 분위기나 두근거림, 냄새 등이 어우러져 비로소 내가 찾는 그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고 지루한 수속 절차가 끝나고 나면, 자판기에서 뽑은 밀크티는 마시기 전에 이미 갈증이 해소되고 이곳에 도착한 것에 안심하게 한다. 다시 만난 여행지의 따뜻한 마중이다. 신주쿠 동쪽 출구를 따라 가부키죠에서 먹던 규동은 새벽 알바를 하고 난 뒤의 노곤함을 달래주었다. 라멘만큼 애착하는 음식이 있을까? 옛날 맛은 이미 잊었고 또 변한지 오래다. 추억으로 찾게 된다. 그 시절 나를 다시 확인하는 셈이다.


하카타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풍경은 그대로인데 내 모습만 바뀌었다는 걸 깨닫는다.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보는 것이다.


짧은 일정이든 긴 일정이든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은 늘 쓸쓸하다.

지난 시간의 아쉬움을 돌아보게 되고 새로운 일상의 무게에 긴장하게 된다. 어차피 긴 여행의 연속성 앞을 지나고 있을 뿐이지만.

호텔 바로 옆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조금 일찍 나선다.


뉴카멜리아호가 하카타에서 다시 부산으로 출항한다.

오늘은 강풍으로 외부 갑판으로 연결된 철문을 여는 것조차 힘들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바다는 흑백이고 거칠다.

불친절한 한낮의 낯선 바다가 큰 숨을 들이켜게 한다.

이렇게 여행 중에 짧은 여행을 마무리한다.


어쩌면 여행은 오해인지도 모르겠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오해.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5.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1.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7.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3.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2.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4.jpg
KakaoTalk_20260302_141115625_06.jpg


#여행_중_작은_여행

#마닐라_일상

#여행인_듯_일상인_듯

#낯선_거리_내게_말을_건다



작가의 이전글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