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을까

by 레나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그것은 칼이었다.

평소 같으면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머리채를 잡았겠지만,

그날의 엄마는 이상하게도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

이내 엄마는 비릿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입은,

다시는 거짓말 못 하게 해야 한다고.


마치 오래 준비한 대사를 꺼내는 사람처럼

말은 낮고 또렷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목을 조르는 손아귀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뺨과 머리를 때리는 소리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잠시 뒤, 어디선가 내 어린 시절 사진들을 들고 오더니

인화지째 모두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엄마는 엄마의 신념이

곧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어기는 사람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결국 집 밖으로 쫓겨났다.

쫓겨났다는 말조차 부드러운 표현이었다.

아니, 어쩌면 '밀려났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문 밖에 남겨진 초등학생이 향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어둠 속 놀이터였다.


이슬 탓인지, 내 몸이 떨리는 탓이었는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그네는

오래된 쇠 소리를 내며 천천히 흔들렸다.

그 위에 앉은 나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했다.

잠시 동안은 아프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새벽이었다.

나는 그 그네 위에서 몇 시간을 버텼다.

평소 같았다면 눈물이 실컷 났겠지만,

아주 모순적이게도 편안해서 잠이 올 것만 같았다.

그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만 생각하며

흔들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전등 불빛이 내 앞을 훑었다.

새벽 순찰을 돌던 경비원의 손전등이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묻길래

입술이 달라붙은 채로 쥐어짜듯 말했다.

쫓겨났다고, 내 탓인 것 같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하루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경비원은 말없이 메모만 했다.

그러곤 곧바로 나를 경찰에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는 새벽을 가르며 다가왔다.

나는 경찰차 뒤편에 몸을 넣었다.

그 안의 공기는 놀이터보다도 더 차갑게 식어있었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경찰관의 말과 달리

나는 온몸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철저히 내 잘못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출소에 닿은건 금방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이 멈칫한 사이,

내가 굶주린 건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관은 손수 깐 오렌지와 탄산음료를 건넸다.

허겁지겁 먹은 오렌지는 이상할 만큼 달았다.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 단맛이 속을 울렸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배고픈 것 같았다.


부모는 금방 도착했다.

아무 말 없이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부모가 나눈 말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제는 무서워서 못 쫓아내겠네.

또 신고할까 봐.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후회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날의 기억은 누군가 고의로 잘라낸 것처럼

몇 장면이 통째로 빠져있다.


나는 어떤 연유든 그곳을 스쳐갈 때가 있다면,

그 파출소를 지나갈 때마다

'네가 신고당했던 파출소' 라며

깔깔 웃던 내 부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새벽에 그 어린아이를 밀어낸 뒤

사이렌 소리가 사방으로 울릴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단 한 번이라도 떠올렸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작은 아이를 꼭 끌어안는다.


언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집을 떠났다.

떠나던 날 언니의 눈은 단호했다.

오래 버티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언니는 알고 있었다.

여기는 아이가 머물 수 있는 집이 아니라는 것을.


언니가 집을 떠나고 남은 건 우리 둘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둘이 아니었다.

오빠는 늘 집안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은 어떤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 생일 선물은 언제나 오빠와 함께였다.

오빠의 생일이 되면 패밀리 레스토랑의 조명이 켜졌고

비싼 선물이 쌓였지만,

내 생일에는 치킨 두 마리를 사달라는 부탁조차

낭비라며 거절당했다.


그 무렵 나는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잘못하면 평생 걸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통증으로 몸 전체가 잠식되던 어느 날,

목발을 짚고 방에서 나오는 데만 몇 분이 걸렸다.


옆 방에는 오빠가 있었다.

게임기 버튼을 연달아 누르고,

헤드폰 너머로 새어 나오는 작은 소리만 들렸다.

내가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숨을 고르며 도움을 청했다.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손을 빌리고 싶었다.

오빠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네가 못 걷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상식적인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그 말은 무심함조차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를 책임의 바깥에 두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애초에 잘못된 전제였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했던 시간은

엄마가 암으로 입원해 있던 시절이다.


중학생이던 나는 수업을 마치면 병실로 향했다.

누구도 나에게 그 역할을 맡기지 않았지만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오빠는 병원에 가자는 말 대신

집이 비었으니 밤새 놀자고 했다.

엄마의 부재는 그에게 있어서는

불편한 공백이 아니라 자유에 불과했다.


어느 날 병실에서 본 엄마는

휠체어를 거절하고 복도를 돌고 있었다.

병실을 도는 엄마의 걸음은 불안정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허리를 억지로 세웠다.

멀쩡하다는 말은 주문처럼 반복됐다.


그리고 결국 엄마는 의사 몰래 조기퇴원을 준비했다.

옆 병실 사람들과 간호사들에게까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사까지 건넸다.

마치 그 모든 것이 자기 의지였다는 듯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소파에 몸을 떨어뜨리듯 누웠다.

집이 편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멀쩡한 표정'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라서였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한층 야윈 엄마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건조한 안부였다.

울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튀어나온 형식적인 말이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엄마는 조기퇴원의 이유를 말해주었다.


오빠가 학교에 지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퇴원을 서둘렀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빠가 했던 말들이 머리에 어지럽게 아른거렸다.


집이 비어서 좋다는 말.

밤새 놀자는 말.

엄마의 병실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사실.


어쩐지 모든 게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내 걱정을 한 번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오빠의 지각에는 병원까지 뒤집을만한 힘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물었다.

왜 자신을 진짜 걱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 하지 않느냐고.

왜 나에게는 단 한 번도 괜찮냐는 말을 먼저 건넨 적이 없었는지.

왜 돌봄의 무게가 늘 한 방향으로만 기울었는지.


말하는 동안 내 목소리는 덜컥거렸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모든 걸 쏟아낸 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엄마에게 그제야 형식적이지 않은 진짜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 품 속에서 깨달았다.

나는 성숙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 빨리 어른의 자리를

떠맡아야 했던 아이였다는 걸.

그리고 그 안아줌은 위로가 아니라

대답을 피하는 방식이라는 걸 어른이 된 나는 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안부를 먼저 묻는 습관이 생겼다.

그게 어른스러움인지,

아니면 그 시절 배운 역할이 몸에 남은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날의 공포와 흔적이

지금의 내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 시절의 나는 얼마나

서둘러 어른이 되어야 했는지 말이다.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오히려 지루함이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난 더하려면 더 할 수도 있었어. 부모라면 다 그래.

너라고 안 그러겠니? 애를 키우다 보면...

너도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을 거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마치 자신이 한 모든 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마지막 문장처럼.


그 말을 들은 날,

어른이 된 내가 아주 조용히 결심했다.


그들이 시작한 어둠을, 나는 여기에서 끝내겠다고.

매거진의 이전글숨을 죽이며 자라난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