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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ul 04. 2022

[바르셀 4일차] 몬세라트 수도원과 시체스 투어

가톨릭 국가에서 술, 술, 또 술!

 

 오늘은 어린 가우디의 가슴을 뛰게 했던 몬세라트 수도원(Montserrat Monastery)가는 날. 둘째날 보았던 카사 밀라에 영감을 준 곳이다. 산봉우리에 세워진 수도원에 딱 도착했을 때 사실 첫인상은 심심했다. 그런데 산책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아예 하룻밤을 묵을 걸'이란 생각이 들었다. 성스러운 분위기가 조용하게 감겼고, 육감적이면서도 웅장한 바위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볼살에 닿을 때마다 한없이 나약해지고 숙연해졌다. 몸이 아팠던 가우디가 자연에서 위안을 얻었단 이유를 알듯 했다. 6만 개의 봉우리와 2000개의 산책코스를 지닌 몬세라트를 내 발로 디뎌내고 싶어서,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푸니쿨라는 타지 않았다.


언뜻 보면 한국의 산같기도 한, 몬세라트 수도원. 각진 바위들이 수도원을 감싸고 있다.

 

 사실 이곳에서도 남편과 다투고 말았다. 그래서 10여 초밖에 주어지지 않는 검은 마리아상(La Moreneta) 관람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여 순례객들의 발길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이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마주할 수 있는데, 그 영험한 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남편에 대한 씩씩거림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수도원 밖을 나서야 했다. 다행히 수도원 밖에서 알록달록한 초에 불을 붙이면서 애써 서로의 성난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조그만 검은 마리아상 기념품을 데려오기로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산책길의 웅장한 기운을 더 느끼다 1시에 시작하는 에스콜라니아 소년 합창단(L’Escolania de Montserrat) 공연을 보기로 했다. 모나코 소년합창단, 생 마르크 합창단의 공연, 그리고 영화 '코러스'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던 나로서는 스페인 소년합창단은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다. 게다가 빈, 파리나무십자가에 이어 3대 유럽 합창단이라고 하니 기대는 더 높아질 수밖에. 이윽고 아이들이 등장했는데, 왠지 장엄하고 축 처지는 음악에 문득 '아이들이 연습하느라 놀지도 못하고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동시에 한 관광객 여자 아이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냈고 그걸 말리는 아버지를 지켜보느라 그렇게 아이들의 성스러운 소리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몬세라트 수도원 내부. 겉 모습 만큼이나 내부도 성스럽다. (좌)는 에스콜라니아 합창단 아이들이 퇴장하는 모습.




 몬세라트 수도원을 뒤로하고 온 시체스(Sitges). 남편이 예약한 투어에 포함돼 있어 오게 된, 지중해 남부 휴양도시다. 바다 색이 금방이라도 풍덩하고 싶은 에메랄드 빛이라,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참고만 있기 힘들었다. 또 누드비치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각자 자유로운 복장으로 누워있는 것도 신기했다. 생각보다 '누드'차림은 많이 없었던 것 같기도.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에 나왔던 고풍스러운 골목길과 계단들을 걷고, 특정 부위만 만져지는 바람에 빛이 바랜 인어상과 시체스 영화제 포스터들을 구경하다, 점심을 먹으러 한 식당에 들렀다.


 옆에 앉은 사람들이 카탈루냐 분들인가 싶어서 맛있는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물어봤는데 자신네들도 여행객들이란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들은 은퇴한 독일인 교수 부부였고, 아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프랑스 대학에서 유럽법을 가르치셨다고 하여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가면서 대화를 나눴다. 유럽에 와서 먹고 자는 아주 간단한 욕구들에만 골몰했는데 이분들 덕에 잠시 학구적인 나로 돌아왔다. 대화 나누는 시간이 길어져 도시 구경을 많이 하지 못했지만 몇 배나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아기자기 예뻤던 시체스. 남편과 나도 이 노부부처럼 늙어서도 지성미를 뽐내며 여행을 하자고 다짐한다.




 무사히 다시 바르셀로나. 한인민박에서 라면세트를 들이켜고 남편이 가고 싶다던 보케리아 시장(Mercat de la Boqueria)으로 갔다. 사실 김치가 포함돼서 시킨 거였는데 김치가 없다고 하셔서 좌절했다는 건 안 비밀. 어찌 됐든 배를 든든히 하고 시장으로 출발했는데 우수수 문을 닫고 있다(!) 야시장인 줄 알았는데 그냥 시장이었던 거다. 서둘러 남편이 노래 부르던 하몽과 생과일주스를 샀다. 문 닫을 시간이 되니 싼값에 땡처리하고 있어서 오히려 재밌는 경험이 됐다. 그리고 레이알 광장(Plaça Reial)으로 돌아와 와인과 맥주를 더 들이부었다. 가우디의 가로등이 반짝인다. 가우디로선 시공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공공건축에 등을 돌리게 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가 남긴 이 작품 덕에 바르셀로나 밤은 낭만 한 스푼을 더 얻었다. 점심에도, 저녁에도, 그리고 후식으로, 언제 어디서든 술을 이렇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도시가 있을까. 흥청망청 취하지 않고 적당한 취기에 즐거움을 한 모금 얹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바르셀로나란 도시의 최대 매력이었다.


(좌) 레이알 광장에서 파는 맥주맛은 잊지 못할 거다. (우)는 문닫기 직전의 보케리아 시장 모습.


 다시 한인민박에 오니 각자 가져온 음식들로 파티가 진행 중이다. 우린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는데 못내 아쉽다. 샹그리아를 들이켜면서 각자의 사랑 얘기들, 사는 얘기들을 풀어놓는다. 코로나 시국에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사장님. 티는 많이 내지 않으셨지만 대화 사이사이로 우여곡절이 짙게 배어있다.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사장님의 기타까지 가져와 김광석 노래를 부르며 신난 남편. 김치가 빠진 라면세트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다소 여자들 뿐이라 어색하고 불편했던 마음을 풀어낸다. 다행이다. 그렇게 민박에서 마지막 밤이자 바르셀로나에서 4일차 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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