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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 Mar 24. 2022

위스키 한 잔

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어쩌면 에세이는 작가의 커다란 TMI가 아닐까 싶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영에게 말했다. 에세이는 이제 못 쓸 것 같다고. 우리 앞에 준비된 맥주 캔은 따지도 않았지만 나는 벌써 취한 사람처럼 속내를 덤덤하게 털어놨다. 그러자 아영은 냉큼 책 한 권을 건넸다. 언니, 이 책 한번 읽어봐요. 강한 사연, TMI가 없어도 글 쓸 수 있다니까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하다면> 하루키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행을 하며 쓴 책이었다. 굴곡 있는 사연이 없어도 근사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재밌을 수 있다고. 아영은 자신이 얼마나 감탄하며 책을 읽었는지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키의 팔자에 대해서 논했다. 봄이면 러닝 하기 좋은 도시를 찾아, 공항으로 향하는 하루키의 체력을. 세계 곳곳을 쏘다니며 글 쓰는 작가의 풍요를.      


 바로 다음 날 위스키를 마시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낮에는 책을, 밤에는 술을 파는 마산 ‘화이트 래빗’에서 달님을 만나기로 했고. 하필이면 가게 입간판에 ‘위스키’가 적혀 있었다. 커다란 백팩에는 하루키가 쓴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 들어있었으니, 거침없이 주문했다. 낮 2시 10분에 먹기에는 딱 봐도 무리인 위스키를.      



 사장님은 위스키 입문자가 마시기 좋을 거라면  모어 15 산을 건넸다. 이걸 마시면 하루키처럼   있을까.  모금 삼키자 속이 타들어  것처럼 뜨거웠다. 함께 건네주신 해바라기 씨앗으로 속을 달래며 책을 펼쳤다. --. 발음만 해도 고급스러운 단어가 곳곳에 박혀 있는 하루키의 책을     넘겼다. 지성이 흐르는 문장 사이로 위스키 향이 실제로 났다. 이걸 어떻게  잔이고 마실 수가 있지.      


 유려한 문장들을 눈으로 훑다가 멈춰서 노트북을 꺼냈다. 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잖아. 아무리 하루키라도 대한민국 경남 창원에서 아이 셋 키우며 동네 공원을 배회하는 여자 이야기를 나보다 잘 쓰진 못하겠지. 글 쓸 결심이 선 나는 앞에 앉은 달님에게 제목을 넌지시 말했다.     


“제목 이거 어때? 하! 루키루키~”     


 하루키와 레드벨벳 <루키> 오마주라고 하기에는 많이 조악한 제목. 달님은 대답 대신 가만히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었다. 싱거운 농담을 안주 삼아 나는 마지막 남은 위스키를 쭈욱 털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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