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미 Mar 26. 2022

비건 라떼 한 잔

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할까.’

 ‘나는 왜 이렇게 솔직하지 못할까.’

 ‘나는 왜...’     


 수많은 화살이 나를 향하는 날이 있다. 종일 어두웠던 마음의 원인 중 하나는 억지로 끊으려고 했던 항우울제 탓도 있을까. 최근에는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아서, 의사와의 상담 없이 약 복용을 중단했다. 용량을 천천히 줄이는 방법이 아니라 단번에 약을 끊었더니 금방 부작용이 나타났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현기증이 나서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마치 머릿속에서 번쩍, 번쩍 섬광이 지나는 느낌, 불편했다.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달님과 드라마 작법 강의를 듣고, 함께 밥을 먹었다. 아이들의 연이은 코로나 확진으로 몇 주를 미룬 약속이었다. 달님은 참외와 가지를 들고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나란히 믹스 커피 한 잔씩을 타서 자리에 앉았다. 비대면 강의가 좋은 건, 강의를 들으면서 딴짓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거다. 보리차를 홀짝이고, 휴대폰 알림을 보는 일도 쉽다.


 드라마 작법 강의 듣기라니, 혼자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일이다. 달님은 언제나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함께 하자고 권하는 동료다.  강의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실용적이고 담백했다. 마치 드라마 오프닝처럼 시작하는 강의 영상이 생경하긴 했지만. 점심을 먹고 책방 오누이에 갔다. 오누이 비건 라떼의 맛을 떠올리면, 몇 십분 걷는 건 일도 아니다. 달님은 향긋한 웨딩 임페리얼을, 나는 아이스 비건 라떼를 시켰다. 그리고 마주 앉아 글을 썼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몇 줄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웠다. <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시리즈에 올릴 글이라서 더 낭패감이 들었다. 하루 한 잔 물처럼 가볍고 꾸준하게 쓰기 위해서 기획한 글인데. 연재 2회 차 만에 장벽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에세이는 아닐까.


 <애매한 재능>을 내고 별다른 외부 기고와 청탁은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 ‘내 글이 별로일까.’, ‘새로운 글을 기대하기 힘든 작가일까.’ 온갖 조바심이 드는 와중에도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에 댓글을 다는 독자 분들이 있었다. 적어도 그분들을 잃고 싶지 않았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첫 책을 낸 지 1년도 안됐는데, 너무 조바심 가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새로운 글을 써서 브런치에 연재했다.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기롭게 시작한 연재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르르 불타오르며 새로운 기획을 했다가, 몇 주가 지나면 시들해졌고, 다시 타오르기를 반복했다. 유명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연재를 중단한다고 해서, 혹은 재연재를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글쓰기가 오로지 혼자와의 약속이 될 때, 얼마나 외로워질 수 있나 다시 실감한다. 집필 계약을 맺고, 혹은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써야 할 사회적 명분이 있다. 그 명분이 앞으로 쓸 동력이 되지만 세상의 모든 ‘쓰는 사람’에게 동기가 주어지진 않는다. 각자가 동기를 만드는 수밖에.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남의 글을 본다. 밀리의 서재에서  연재 중인 박상영 작가님의 <일은 서울에서, 잠은 제주에서> 읽었다. 유머와 위트는 타고난 재능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박상영 작가님의 위트를 애정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완벽히 창조력을 잃었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다.

 .

 .

 .

 더불어 나는 웃음을 잃었다.                


- 일은 서울에서, 잠은 제주에서 1화

 


 이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깊은 공감을 했다. 우울증 환자이면서 남을 웃길 때 가장 희열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박상영 작가님에게 영혼의 뻐꾸기라도 한 마리 날려 보내고 싶었다. 웃기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당혹감은 얼마나 깊은 절망을 느끼게 하는가. 1회부터 12회까지 연재 분량을 천천히 읽었다. 제주 가파도 레지던지 상주 작가로 가게 된 박상영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웃었는지 모른다. 인생의 모든 티엠아이가 글이 되는 작가의 삶. 그 티엠아이의 무게에 괴로웠는데 박상영 작가님의 티엠아이는 이토록 가볍고 즐거웠다.


 

어떤 악당보다도 방에 나타난 지네 한 마리가 무서웠고, 그를 무찌르는 여정을 보면서 한껏 몰입했다. 살육 현장 중계의 글을 보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게 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 박상영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씩 막혔던 글이 풀렸다. 물론 2/3 정도 쓰고 노트북을 닫아야 했지만. (아이들 하원 시간을 맞춰야 했다. 따쉬)     


 결국 쓰던 글은 끝을 맺지 못하고 다음 날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쓴 글을 다시 읽었다. 억지로 웃기려는 필사의 의지가 돋보였다. 일단 빈 속에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아이들이 등 뒤에 올라타고, 실내화로 싸움을 하는 와중에 몇 줄을 써냈다. 역시 웃기진 않더라도 어제의 어두움은 조금 털어낼 순 있었다. 후련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꿀 차 한 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