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쇼 Dec 23. 2022

편지는 최고의 소통수단이다.

유치환 '행복'

대구 향토문학박물관 전시. 아마도 작년 10월쯤이었을터다. 


갈증과 후회, 아주 약간의 슬픔. 이런 감정이 뒤섞인 얼굴을 본 후배가 물었다. "선배, 오늘 눈빛이 왜 이렇게 슬퍼요? 총 맞았어요?" 예상치 못한 일거리가 던져졌을 때를 이쪽 업계 용어로 총을 맞았다고 표현한다. 글쎄, 그날은 정말 총 맞은 기분이었다. 일거리 때문은 아니었다. 


편지를 썼다. 더 이상 시달리기 싫었다. 꿈속에서 그는 나를 괴롭혔다. 매일매일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서너 달에 한 번씩 그는 내 꿈에 나타났다. 기막힌 시간차 공격이었다.  


한 번은 그냥 마주치는 꿈이었다. 나도 그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너무 괴로웠다. 다신 안 그러겠다. 내가 너무 바보였다. 그렇게 붙잡고 울다가 깨달았다. 현실이 아니다. 현실일리가 없다. 두 번째 꿈은 내 업에 종사하던 중 만나게 된 내용이다. 나와 그는 취재차 만난 사이였다. 아주 우연찮게 마주쳤지만, 그 밝은 얼굴로 "밥은 먹었어?"라고 물었다. 못 먹었다고 하니 먹을 것을 챙겨줬다.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행복했다. 그는 나를 안아줬다. 너무 따뜻했다. 다시 깨달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깨고 싶지 않아서 버텼는데 깼다. 출근 알람이 한스러웠다. 


이제는 참을 수 없다. 뭐라도 해야 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다. 뭘 해도 용서받는 날이다. 어렸을 적 본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는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규정했다. 나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편지야말로 최고의 소통 수단이다. 상대 상황이나 기분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최고의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 최소한 그 편지지는 온전한 나의 공간이다. 아주 솔직하게 거침없이 썼다. 처음에 쓴 편지는 그야말로 휘갈긴, 원초적인 내용만 가득했다. 네가 보고 싶다. 네가 보고 싶어 미치겠다.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적당히, 알코올 기운이 오른 상황에서 쓴 내용이었다. 글로 밥벌이해서 먹는 사람의 글이 아니었다(물론 지금도 술 처먹고 쓰는 글이다). 


다시 편지를 썼다. 훨씬 표현이 정제됐다. 주술 호응을 맞췄고, 동어 반복은 최대한 깎아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눌러 담았다. 쓰다 보니 반성문이 됐다. 아주 많이 미숙한 내가, 당신과 함께 무작정 세상에 발을 딛겠다고 말하던 것을 뉘우치고 반성했다. 사람의 신뢰라는 것이 말 한마디에 좌우된다는 점을 알 만한 나이임에도 나는 그냥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고. 그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매일 어리광을 부리면서 함께 살자 떼를 썼다고. 반성한 만큼 지금은 어리광을 부리기보다는 어른처럼 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두세 번 소리 내어 읽어봤다. 대충 글 어귀가 맞았다. 그대로 보냈다. 마음이 편해졌다. 


답장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아니다. 답이 오길 기다렸지만, 답이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냥. 그 순간만은 무척 행복했다. 내 이야기를 정돈해서 그에게 알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선배, 오늘 눈빛이 왜 이렇게 슬퍼요? 총 맞았어요?"라고 물은 모 후배님. 사실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편안했고요. 슬펐습니다. 일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답장이 답변이다. 그래, 그는 참 현명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는 내게 최고의 해답을 안겨줬던 사람이다. 안녕이 답이었다. 대구에 혼자 놀러 갔을 때, 향토문학박물관에서 본 시가 떠올랐다. 1967년에 사망한 유치환이라는 사람이 썼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그야말로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누군가가 읽을 글을 내 마음대로 쓰고 있다.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각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붙이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 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작가의 이전글 화천대유단상 : 전문가들의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