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 두어야 보이는 것들
무색무취(無色無臭).
바람은 혼자 오지 않는다.
밥 짓는 냄새에 실려 오거나
시골집 굴뚝에서 꽃대처럼 피어오른
연기에 몸을 묻혀 온다.
낙엽과 바람.
고추바람이 거리를 할퀴던 날이었다.
지난가을의 잔상들이
바람에 몸을 내어주고 있었다.
박차(拍車)의 형상을 닮은 거대한 구름이
조그마한 흐트러짐도 없이
지리산 능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크고 무거운 것들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듯했다.
옷깃을 세우고 화엄사에 올랐다.
보제루 뒤편,
추사가 쓴 ‘華藏(화장)’이라는 글씨 앞에 서서
획의 모양을 더듬고
그 안에 담긴 뜻에
잠시 머물렀다.
뒤돌아 대웅전을 향하던 중
동 오층석탑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와
그 위를 가볍게 오가는
호피 빛 고양이를 보았다.
그림자 위에
또 다른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이 하나 있었다.
여러 차례 이 산사를 드나들며
쉽게 마주하지 못했던
각황전 앞 석등.
화엄사 국보 중 하나인 이 석등은
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몸을 고쳐 세웠고,
이제야 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리산 능선 위에는
불두화 한 송이처럼
낮달이 피어 있었다.
그 달을 석등의 귀꽃 위에 얹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능선과 옥개석 사이에 두고
사진을 남겼다.
사이에 두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산사에서 내려와
읍내의 한 식당에 앉아
저녁을 먹는 동안,
작은 웃음이 따라왔다.
시절의 기운이 서린 시멘트 벽과
우리의 눈빛 사이에
이런 말이 놓여 있었다.
‘팔로우하고 소식 받으세요.
팔로우하고 사장님 보여드리면 좋아하십니다!’
맞팔을 해 준다거나
서비스로 음료수라도 하나 준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다.
사장님을 향한 꽤나 공손한 대접임을
알아차린 동행과 나에게
그 문장은
오래도록 웃음을 남겼다.
「낮달」
꾸―ㄱ 꾸―ㄱ 꾹꾹
앞산에 멧비둘기가 울고
학교서 온 소년이 툇마루에 앉아 있다
산등성이 위로
흰쌀 같은 낮달이 돋아
텅 빈 하늘 건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