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미궁 속에 박제된 초상
작품 :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1907
눈이 시리다 못해 아프다. 캔버스 전체를 집요하게 뒤덮은 이 압도적인 금박들. 사람들은 이 그림 앞에서 관능과 찬란함을 말하지만, 밤 11시의 적막 속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을 지워버린 넘쳐버린 장식의 폭력성이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붓보다 금박을 붙이는 칼을 더 자주 들었다. 비잔틴 모자이크의 영광을 20세기 빈의 거실로 옮겨오려 했던 그의 시도는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 매혹의 깊이만큼, 모델인 아델레의 실존은 희미해진다. 유대인 자산가의 아내로서, 그리고 수많은 유산의 아픔을 겪은 한 여성으로서 그녀가 가졌을 내면의 균열을 클림트는 정교한 기하학적인 화려한 문양 속에 숨겨버렸다.
이 그림의 화려한 금색 소용돌이와 눈 장식들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 동안, 그림 속 아델레의 창백한 얼굴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간신히 수면 위로 떠 있다. 클림트는 그녀를 그린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재료 삼아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감옥을 설계한 것일까.
이것은 초상화인 동시에, 인물을 하나의 상징처럼 굳혀 버린 시선의 굴레인 것이다.
화가는 의뢰인의 자본을 미학적 실험의 동력으로 삼았고, 그 결과물은 결국 모델의 개인성을 밀어내고 남은 장식의 승리였다. 클림트가 발라놓은 저 금박들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현실의 비루함을 예술적 신화로 승격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그 황금빛 필터가 강렬해질수록, 우리가 마주해야 할 한 인간의 온기는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화려한 유폐에 끌리는 걸까. 어쩌면 우리 역시 삶 속의 복잡한 슬픔을, 눈부신 장식 아래 숨겨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클림트가 만들어낸 이 황금빛 감옥은, 예술이 한 인간의 고독을 어떻게 아름다운 감상의 구경거리로 바꾸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밤 11시, 이 찬란한 빛 아래를 다시 들여다보라. 장식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화려한 문양의 일부가 되어가는 한 여자의 무감각한 시선이 당신을 향하고 있다.
가장 눈부신 것은 대개 가장 깊은 공허를 감추고 있는 법이다. 클림트의 황금기는 어쩌면, 인간이라는 깨지기 쉬운 존재를 영원히 썩지 않는 금속의 질감 뒤로 숨겨버린 위대한 위장의 연금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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