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영원한 적(敵)입니다. - 아마데우스 '살리에리'
평범하다는 건 뭘까요? 평균값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값이라는데, 어쩌면 평범이라는 것도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평범하다며 절망하는 이 극의 주인공 살리에리도 실은 평범하지 않으니까요. 존재하지 않는 값이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생각을 내내 했었던 것 같아요.
살리에리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살리에리의 인생에 대해 논하면서 정작 극의 이름은 ‘아마데우스’라니. 거기다 이 공연을 보러 갔을 무렵 공연장에 크게 붙어 있던 ‘마술피리’의 공연 포스터는 마치 살리에리를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반은 농담이지만요.
이 연극은 동명의 영화와 그 스토리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살리에리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어요.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이 잘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어쨌든, 살리에리는 아주 독실한 작곡가이자 신앙심을 가진 인간입니다.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는 만큼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금욕적으로 살아가요. 그런 살리에리의 삶은 완만하지만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흘러가던 살리에리의 인생은 모차르트라고 하는 거대한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너무 높아서 이걸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라고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죠.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모차르트와의 만남으로 살리에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까,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살리에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남을 돕고, 금욕적으로 살면서 신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했던 자신의 유일한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신을 향해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적입니다. 영원한 적.”
여기에서 1막이 끝나요. 저는 이 대사를 종종 마주했었습니다. 글에서, 또 어느 영상에서요. 그런데 막상 진짜 눈으로 보고 있자니 그 느낌이 남달라서 숨을 들이킨 채로 멍하니 배우를 바라보기만 했었어요. 처절하게 울면서 사랑했던 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영영 증오하는 대상으로 남겨두는 그 마음이 어떤 걸까요. 종종 이야기하곤 합니다. 원망과 증오가 삶의 원동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그 뒤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서 살리에리의 삶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2막을 관람했습니다. 살리에리는 2막에서는 더 집요하고 치열하게 모차르트의 인생에 훼방을 놓습니다. 그러면서도 모차르트의 모든 공연을 보러 가요.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완벽한 음악적 경지에 대해 감탄하고, 질투하고, 또 그것을 자신만 알아보도록 한 신에 대해 원망을 늘어놓기도 하면서요. 당시 대중에게는 사랑받지 못했던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살리에리는 이미 알아본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과연 살리에리는 평범한 사람인가? 라는 의문이 생겼어요. 그는 궁정 작곡가가 되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으며,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낼 줄 아는 인물이었으니까요. 이 극을 만들고 연출한 사람이 정확하게 어떤 목적을 갖고 무대 위에 올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극을 보는 내내 살리에리의 그 평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재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한때 김연아 선수의 ‘무슨 생각을 해,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하는 인터뷰 사진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죠. 월드 클래스 선수조차 그냥 아무 생각 않고 열심히 연습에 임한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그 정도의 위치까지 가면 대단한 포부를 갖고 매번 연습에 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매번 정해진 양의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살리에리는 평범하지 않았다는 거죠.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금욕적으로 살면서, 매일 노력하고, 부지런히 살아요. 모차르트라고 하는 신의 재능을 받아 빛나는 사람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살리에리라는 천재는 아니지만 노력해서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사람의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차르트의 마지막이 그렇게 안타까웠던 것만큼 살리에리의 마지막에도 연민을 느낍니다. 살리에리는 신이 자신을 오래 살려두어 모차르트의 음악이 사랑받는 것을 보게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살리에리의 음악적 감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살리에리는 전자에 대해서만 깊게 골몰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이것이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재능을 가진 것만큼이나 그 재능을 알아보는 눈도 중요한 요즘 시대에서, 노력하는 사람이 드문 세상에 살리에리는 과연 평범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선생님께서 이 연극을 이미 보셨다면 ‘왜 쟤는 저렇게 인생을 좋게만 볼까?’ 하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인간찬가형 인간이니까요. 인류는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도 두 걸음 나아가는 존재라고 믿으며 당장의 퇴보가 있어도 결국 인류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믿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고 시행착오를 겪는 거라고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바라봤기 때문에 살리에리의 삶을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살리에리를 보는 내내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이반이 했던 거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릅니다. 선택받은 소수의 민족이 아닌, 신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수많은 이들의 편에 가서 서겠다는 그의 선언이요.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만나 자신의 재능이 평범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우울감에 빠지고, 결국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예전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그 많은 말과 행동을 하면서까지요. 물론 이 행동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극을 보고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리에리가 평범하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우리도 어쩌면 평범하지 않은 나의 재능은 외면하고 평범한 다른 것들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건지는 아닐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종종 제가 잘하지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어떤 것들에 우울감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살리에리를 떠올립니다. 오랜 세월 믿고 의지했던 신을 향해 ‘당신은 나의 영원한 적입니다’라고 외친 그를요. 하지만 같은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절망했던 살리에리에게도 남들은 가지지 못한 특별한 재능이 있었고, 어쩌면 나는 그가 노력했던 것의 반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니까요. 빛나는 누군가의 조연이 아니라 내가 주연이 되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것 역시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내 마음 안에서는 중심이 된다면 조금은 그 평범함에서 오는 감정이 긍정적이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조금 더 긍정적인 시선을 갖고 바라본다면 내게만 있는 어떤 특별한 재능을 찾아서 내게 이 재능을 준 신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많은 의문이 들지만, 실은 모두가 평범하지 않은 어떤 지점을 갖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어요. 그 특별함을 찾기 위해 삶을 걸 수는 없겠지만, 찾아내지 못한 그 특별함이 내 삶의 어떤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그걸 위안 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옵니다. 오다, 오지 않다 하네요.
우산이 비상약처럼 필요한 순간이 이어질 것 같아요.
건강 조심하세요. 또 편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