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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 Mar 03. 2024

어떻게 살 거냐고 그만 좀 물어보세요

나도 몰라…….

얼마 전에 영화 <파묘>를 봤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다고, 자긴 두 번 볼 거라며 내게도 얼른 보라고 추천하기에 또 귀가 얇지도 않으면서 팔랑거리면서 표를 예매했다. 일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 근처의 갤러리아 백화점 안에 있는 CGV였다. 살뜰하게 모아둔 포인트도 써서 어쨌든 정가의  가격으로 예매를 마치자 뿌듯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원래 무속 소재의 영화를 좋아했다. 쫄보라서 고어도, 공포 영화도 못 보는 주제에 무속 소재 영화는 또 잘 봤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 <곡성>....... 우습게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 물론 <곡성>은 일본 귀신이라 정서가 안 맞아서 속으로 역시 난 일본이랑 안 맞다는 선입견에 한 겹을 더 보탰지만 잘 보기는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봉길이와 화림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화림이는 건강한 애니까 자기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했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거다’라고. 그러더니 ‘너는 굳이 따지자면 화림이를 닮았다’라고 했다. 사실 나는 무당 팔자 망치니까 점도 보러 가지 말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던 사람인데 말이다……. 물론 친구는 화림이의 ‘건강한 면’이 닮았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친구의 말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 친구와는 벌써 햇수로만 따지면 4년째 보고 있다. 그러니 제법 나를 오래 본 친구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던 때도 있었으므로 친구의 판단은 거의 틀린 적이 없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인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존감이 높은 편이고, 자존심도 센 편이지만 그렇다고 이게 건강함의 척도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종종 ‘내가 죽는 일’에 대해 생각하니까.


고양이 세 마리와 같이 살고 있는데, 셋 다 구조된 고양이다. 첫째는 3주 쯤, 둘째도 그즈음 구조되어 3개월령이 되었을 때 우리 집에 왔다. 셋째는 여섯 살이 되는 겨울에 구조되어 그 해 가을에 우리 집에 왔다. 아주 가끔 ‘내가 잘해주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면 어떤 순간보다 우울해지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네 덕분에 그 애들이 따뜻하고 시원한 집에서 굶지 않고 사는 거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한다. 사실은 그 털뭉치 세 마리가 날 살게 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도 말이다. 물론 굳이 말하지는 않는다. 우울한 이야기는 전염이 쉽다. 내 친구들도 우울하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대전에 사는 친구를 보러 놀러갔다가 시내에 유일하게 있다는 독립서점에서 구매한 책인 유진목 작가의 <산책과 연애>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했던 구절을 발견했다. “나는 죽지 못할 바에 쓸모라도 있고 싶다. 내가 사는 이 세계에.” 그래서 그냥 ‘내가 죽는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고민하지 않고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고민하기로 했다.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일단 오늘은 어림잡아 봐도 100개가 됐다. 음,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살아야겠네. 자기 전에는 영양제를 챙겨 먹고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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