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로딘느 갈레아/창비
살아남은 자의 기록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스리즈’는 ‘버찌’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엄마는 버찌를 몰래 따다 아빠를 만났고 연애가 시작되어 스리즈를 낳았다. 스리즈는 버찌고 버찌는 빨갛다. 빨간 스리즈는 빨간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스리즈가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이 빨갛게 물든다.
스리즈가 처음 지하철을 탄 것은 열한 살 때 엄마아빠가 이혼하고 빠리에 있는 아빠 집에 다니게 되면서이다. 그날부터 열다섯이 된 지금까지 스리즈는 지하철이 재미있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단어를 각자의 방식으로 골라 쓰는 것이 흥미롭다. 울음을 참는 여자를 지켜보느라 종점까지 간 적도 있다. 몸 전체가 눈물인 그 여자를 두고 내려 버릴 수 없었다. 그 순간 그 여자는 남편을 잃은 스리즈의 엄마가 되고 스리즈 자신이 된다. 스리즈 눈에는 구걸하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스리즈 눈에는’이라 표현한 이유는 지하철 안에 있는 승객들에게 걸인은 투명인간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인의 말을 들어줄 마음이 스리즈 말고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난 여름이 두려워요, 여름이 페스트만큼 두려워요, 하긴 우리가 페스트 환자지만, 여러분은 평소보다 우릴 더 피할 테죠, 우린 평소보다 더 썩은 냄새를 풍길 테고요, 여름엔 동전 하나라도 덜 주더군요, 우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죠, 여름을 나는 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실제로는 정반대인데, 여름은 지옥이에요, 지옥. (31)
‘그날’ 아침 스리즈는 학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젊은 노숙자를 본다. 그는 여름이 얼마나 힘든 계절인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노숙인으로서 여름이 두렵다는 건 통념을 깨는 말이다. 소설가 황석영은 사회적 연대를 말하는 소설, <아우를 위하여>에서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라고 적는다. 걸인이 죽는 계절은 대개 겨울이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은 들을 만한 이야기였지만 그날 지하철 안에서 그 넋두리는 허공을 맴돌고 허리에 찬 깡통 소리만 거슬릴 뿐이었다.
스리즈의 엄마는 걸인을 보면 동전을 건네는 쪽이고 아빠는 도와주면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리즈는 걸인이 하는 말을 듣는다. 누군가 이야기를 할 때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스리즈는 곁에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구걸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스리즈에게 그는 걸인이기 이전에 젊은 청년이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근시 때문인가 하다가 인공눈물이 필요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청년을 관찰한다. 짧은 순간 스리즈는 그의 푸르게 빛나는 눈을 보고 그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스리즈를 본다. 스리즈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것을 청년은 안다.
난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99)
그날 밤 스리즈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아침에 본 ‘푸른 눈’을 또 만난다. 배고픈 푸른 눈은 소리 높여 분노의 언어를 토해내고 지하철 안은 공포와 긴장으로 가득하다. 스리즈는 곧 일어나게 될 사건을 감지한다. 푸른 눈이 지하철에서 내리길 바란다. 푸른눈의 절규를 들으며 스리즈가 주머니 속 2유로를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푸른 눈은 아무리 소리쳐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그리고 모든 언어를 소진한 자기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이야기를 들어준 스리즈만 남겨 둔 채.
난 말이야, 난 그걸 머릿속에 가두고 있을 수가 없어. 그게 썩어 가고 있거든. 혹이 되어 가고 있거든. 그게 뒤죽박죽 섞여서 악몽을 꾸게 하거든 그건 약으로도 고칠 수 없어. 엄마가 한사코 먹이려 드는 비타민 같은 걸로는. 모든 걸 명백히 드러내지 않으면 그건 서로 얽히고 뭉쳐버릴 거야. 그러면 혹은 더 딱딱해지겠지 난 모든 걸 기억해 내기로 결심했어. 자세하게, 아주 세세한 것까지도. (24)
끔찍한 폭력을 목도하고 홀로 살아남은 자가 된 스리즈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주변 어른들은 언젠가는 잊힐 것이고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고통의 혹은 점점 커지고 딱딱해진다. 마침내 스리즈는 충실한 기록자가 될 것을 다짐한다. 그날 본 것을 낱낱이 기록하여 세상에 꺼내 놓기로 한다. 그런데, 열다섯 소녀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일처럼 보인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 소환해 기록해야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운명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아마도, 스리즈에게 희생자들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싶다.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로 구체화하는 것이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이라고 스리즈는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생각은 옳아 보인다. 쓰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는가.
기록하는 운명을 감당하는 모든 스리즈들이 결국은 해방에 이르기를 바란다.
버찌 바구니(이복흠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