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와 용병

용맹과 충성, 그리고 마음의 병

by witsfinder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시인의 <깃발>이다.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시였다고 기억한다. 서양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시기에 문인들 역시 글 속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1688년, 스위스 의사 요하네스 호퍼(Johannes Hofer)는 논문에서 고향을 떠난 스위스 용병들이 겪던 심한 우울, 식욕부진, 환청과 같은 병리적 증상에 ‘노스탤지어(nostalgia)’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낭만적인 향수(鄕愁)가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스위스는 지금은 부유국가이다. 그렇지만 알프스 산지에서 마땅한 자원이 없어 가난에 시달리던 시대에는 유럽 각지에 용병을 보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머나먼 타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며, 그들은 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스위스 루체른에 가면 '빈사의 사자'라는 대형 조각상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의 왕정이 무너질 때, 스위스 용병들은 고용주였던 프랑스 왕을 끝까지 지키다 전사하거나 처형당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1820년대에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것이다.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무기는 버릴 수 없다.' 용병은 일종의 사업이므로 계속 유지하려면 용맹함과 고객에 대한 충성이 무엇보다 필수였다. 만일 그들이 도망친다면 스위스 용병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더 이상 다른 곳에도 용병을 보낼 수 없게 되므로 끝까지 싸워야 했다.


지금까지도 스위스 용병은 바티칸 교황청을 지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 고산지대인 네팔의 구르카 용병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며 자국의 주요 외화 수입원이 되고 있다.


빈사의 사자상을 보고 나서 걷던 루체른 거리에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 지나치게 깔끔한 거리. 옷을 벗은 한 청년이 차량이 다니는 도로 한가운데 서서 무언가 외치고 있었다. 차마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속옷조차 입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행위예술이나 시위는 아니고, 마음이 아픈 청년이었던 것 같다.


제복과 무기, 규율로 무장한 용병에게도, 몇백 년 전이라면 용병이 되었을지도 모를 젊은이에게도, 마음의 병은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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