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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Jan 29. 2021

생의 저편에서 ‘그냥’ 주어진 행복의 다음 장을 넘기다

소울(2020), 피트 닥터, 켐프 파워스, 107분

※영화 〈소울〉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 4편에는 ‘포트키’ 마법이 등장한다. 평범한 물건에 텔레포트 마법을 주입하여 몸에 닿기만 하면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는 이 기술은 순간이동이 불가한 미성년자였던 해리 포터를 환희의 함성이 가득했던 퀴디치 경기장으로도, 죽음의 숙적인 볼드모트의 코앞으로도 데려가 주었다. 인생 최고의 기억을 만드는 동시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던 최악의 경험을 쥐여주는 포트키의 특별한 위력과 달리, 그 주문의 대상은 평범한 주위의 어떤 물건도 가능하다. 낡아빠진 신발부터 우승 트로피까지 마법을 건 당사자가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는 이 신비한 마법은 지극히 인간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상상으로 보인다. 그럴듯한 지팡이 없이도 우리의 뇌는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미처 지나쳤던 평범한 대상에 마법처럼 특별했던 기억을 선사하고야 만다. 시대와 문화를 넘나들며 존재했던 마법의 역사를 기억해 보자. 정교한 주술과 불가사의한 능력은 사실 지극히 평범한 현상을 거치대 삼아 영감을 받아간다.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함께 하는 향기가 있다고 느낀다든지, 잊었던 공간의 풍경을 보며 과거의 인상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사람들은 특별한 순간을 망각한 채 눈에 들어오는 물건에 주문을 건다. 기이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나름의 정당화랄까. 뭔가 딱 잘라 분석하기 어려운 뒤죽박죽인 삶의 신비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상상의 힘은 놀랍게도 내 안의 나와 닮아있다. 그리고 영화 〈소울〉은 재즈의 선율로 서로가 낯선 눈앞의 관객, 그 안의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해 기적에 목매지 말라고 위로한다.

출처: 다음 영화

어느덧 픽사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 피트 닥터의 영화는 각기 다른 형태의 삶이기에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딸의 사춘기 시절 종잡을 수 없던 모습이 〈인사이드 아웃〉의 시작이었다면, 〈소울〉 아들이 태어난 23년 전부터 떠올린 소재를 영화화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태어나기 전 세상과 죽음 직전의 세상을 구현한 그에게 세대를 불문한 공감의 서사를 이루는 요체는 기억에 있다.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몬스터 주식회사〉(2001)는 아이들의 일상 속 기억이 현실이 되는 꿈이라는 소재로 낯선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말한다. 그의 이름을 알렸던 〈업〉(2009)에서는 저무는 노년의 삶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흘러간 시절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혼란기의 청소년에게 삶의 모든 기억을 구성하는 각자의 감정에 주목하는 전작 〈인사이드 아웃〉(2015)까지, 기억을 향한 감독의 애정은 픽사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픽사는 위태롭고 용감하다. 예상치 못한 과감한 시도에 흔들리고, 처음에 원했던 답이 아닐지라도 괜찮다. 불발의 여정을 겪어 온 지금 나의 모양은 여전히 멋지기 때문이다. 불안한 용기가 있기에 안온한 우주선의 삶 대신 생명의 땅을 밟을 수 있고(〈월-E〉), 친구의 다음 발걸음을 응원할 줄 알게 된 장난감의 행복한 이별이 반가운 것이다(〈토이 스토리 3〉). 이는 과거의 기억에 머뭇거리는 모두에게 포기라는 선택지를 제시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삶의 고민을 담은 이들에게 지금을 기꺼이 털어낼 힘을 주는 서사는 〈소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한한 인간을 일깨우는 모호한 경계의 공간

‘조 가드너’는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기간제 음악 선생님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재즈 뮤지션을 향한 한결같은 꿈은 여전히 그의 삶을 지배한다. 열정에 잠긴 채 저평가된 삶의 기억만 남아있는 조가 필사적으로 재즈를 놓지 않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다는 절박함의 기제에서 비롯된다. 어머니는 반대하고 제안은 번번이 좌절인 일상에 권태를 느끼던 중 조는 평소 존경하던 아티스트 ‘도로시아 윌리엄스’의 공연 멤버 제안을 받는다. 클럽 하프 노트에서 수준급의 기량을 보인 후 기뻐하던 조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의 순간에 직면한다. 영화는 뉴에이지의 깊은 통찰을 담아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포근한 중간계를 구현한다. 조가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는 길목에는 끝없는 컨베이어 벨트가 영혼을 인도한다. 탈출을 시도하다 도착한 태어나기 전의 세상 ‘유 세미나’는 체계적인 분업화로 운영되는 보육 기관처럼 지구에서 태어날 영혼에 성격을 부여한다. 뉴에이지 사상에 현대적 시스템을 접목한 이곳은 초월적 세계관과 복잡한 철학을 익숙한 일상에 대입해 영화의 주제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정신적 각성을 달성한 무아지경의 상태를 몸 안의 영혼이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발상이나, 온 우주의 양자장을 의인화한 ‘리’의 이차원적 형상은 직관적이면서 단순한 상상력으로 관객을 자극한다.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이자 장점인 이미지의 향연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중반까지 카메라는 딜레마적 혼란으로 내세와 외세를 넘나들며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조의 여정을 따라간다. 저세상으로 가지 않기 위해 조는 유 세미나에서 멘토를 가장해 지구로 돌아가려 한다. 그와 매칭이 된 영혼은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태어나고 싶지 않아 하는 ‘22’다. 이름부터 오도 가도 못 하는 ‘CATCH-22’를 연상시키는 이 캐릭터는 삶의 목적을 잃은 채 중간계에서 배회한다. 유 세미나의 새 영혼들은 지구로 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구의 온갖 체험이 가능한 ‘모든 것의 전당’을 가거나, 지구에서 나름의 업적을 세운 영혼들이 멘토 역할을 하며 ‘불꽃’을 이끌어준다. 조는 ‘22’의 배지를 다 채워준 뒤 이를 넘겨받아 지구로 갈 심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불꽃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재즈였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클럽에 간 이후부터 그가 살아가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불꽃이 종착지라고 생각한 조는 22에게 궁극의 목표를 짚어주기 위해 종횡무진으로 움직이지만. 사실 마지막 배지의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닌 삶의 시작을 알리는 불씨와도 같았다. 모든 모닥불은 작은 불씨로부터 피어나지만 그 이후의 역할은 나머지 재료들이 맡는다. 그 안에 어떤 땔감을 넣는가는 온전히 자신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유 세미나에서 모은 지구행 배지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손에 쥐어진 몇 가지의 것만이 나를 완성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소중한 것들이 어쩌면 예측 불가의 다음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깨달음은, 무한의 시간 동안 우리를 지켜본 테리의 말마따나 ‘단순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짧은 생의 단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내 삶을 지탱한다고 여겼던 것이 어쩌면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일까. 생과 사의 분기점에 선 조를 통해 영화는 관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바로 지금이라고 눈짓하고 있다.  



혼돈을 긍정하는 세상을 바라다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 ‘소울 Soul’은 영적인 의미와 더불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신이자 상징인 ‘재즈’라는 문화적 코드와 연결된다. 재즈라는 음악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혼돈 Chaos’이다. 재즈의 기본인 플랫과 즉흥연주는 음표 사이의 경계에 감춰진 화음, 합의되지 않은 무질서 속의 아름다운 질서로 보인다. 마치 무질서한 뉴욕의 복잡한 거리에도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질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조는 클럽 '하프 노트’에서 대망의 첫 합주를 한다. 피아노를 대하는 조의 열정은 (연주 당시에는 몰랐지만) 영혼을 육체와 정신 사이의 사막으로 데려간다. 알고 보면 조가 영적인 무아無我로 올라가는 모든 순간은 짜인 음표와 악보가 아닌,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담은 즉흥연주를 할 때다. 재즈의 무질서와 혼돈은 영혼을 해방한다. 그 안에 명확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선율에 기댄 각자의 음악을 받아 그 위에 자신의 음악을 얹기만 한다면.


재즈의 정신과는 달리 조와 22는 뚜렷한 답을 바랐다. 지구로 떨어져 22는 조의 몸으로, 조는 고양이 ‘키튼즈’의 몸으로 들어간다. 이후 영화는 두 영혼이 제 자리를 찾고 조가 무사히 공연을 끝마칠 수 있을지를 따라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조와 22는 낯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관망하며 삶의 의미를 재정립한다. 고양이의 몸과 인간의 몸으로 들어간 두 영혼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에 답답해한다. 신체의 부조화는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조는 삐걱거리는 원래 몸을 지켜보며 숨겨진 이면을 발견한다. 유달리 22의 영혼이 조작하는 자신의 몸을 응시하는 조(의 영혼이 들어간 고양이)를 클로즈업한 장면이 많았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부조화는 나를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사진 속 재즈의 거장이 거울을 바라봤던 것은 다르게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나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전혀 다른 나를 지켜보는 경험은 미처 지나친 주변의 삶에 담긴 일상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 22 역시 영혼으로 지낸 오랜 삶에서 벗어나 인간의 세계를 체험하며 지루하고 의미 없던 인간의 오랜 역사 속 개개인의 인생에서 마주치는 미시사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주춤대면서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삶을 마주친 조와 22는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리학의 혼돈 이론에 따르면 카오스 속에도 논리적 법칙성이 있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서도 규칙과 질서는 존재한다. 뉴욕과 재즈,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정답은 없다. 혼돈의 우주에서 시간은 비선형적이다. 죽은 영혼이 우주의 일부가 되고, 다시 새로운 백지의 영혼으로 태어나듯, 방향성이 있다고 믿었던 관객에게 영화는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한다. 생사의 경계에 놓인 유 세미나의 세계에서 규율과 질서를 담당하는 유일한 캐릭터인 회계사 ‘리’는 영혼의 삶이 아닌 그들의 머릿수에 집착한다. 계산에 따르면 조 가드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하지만 리는 그에게 과감히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완벽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재즈처럼, 분명한 선이 있는 것 같던 질서 잡힌 양자장의 세계에도 예외는 있다. 현실과 꿈의 간극에 좌절과 단념으로 매몰되었던 조의 삶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잠시 숨을 고르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거대한 우주는 22 같은 사고뭉치도,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제리도 품어줄 수 있지 않은가. 우리도 나 한 사람 정도 품어줄 자리 정도는 가지고 있다. 다만 스쳐 지나가 몰랐을 뿐이다.

     


〈소울〉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낸 바로 그 순간 이후를 관찰한다. 바다의 익숙함에 끊임없이 바다를 집착하던 물고기처럼, 조는 이미 재즈의 바다에서 그 음악을 사랑했지만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부족함만 바라보던 조는 영혼을 체험하며 모든 것에 기뻐했던 숨겨진 자신을 바라보았다. 영화는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태어나기 전과 죽기 전 영혼은 모두 망각이라는 공통점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억을 채워 넣는다. 그리하여 〈소울〉은 망각의 이야기이자 집착에서 자유롭기 위해 감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이야기이다. 뉴욕 닉스의 연패에도, 계속된 불합격과 탈락에도 놓을 수 없던 꿈이라는 고통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넘쳐난다. 그렇게 따지자면 세상은 보기보다 복잡하면서도 얼마나 명징한지 모른다.      


마지막 불꽃을 찾는 22에게 조는 말한다.

하늘을 보거나 걷는 건 삶의 목적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삶은 수단이거나 목적일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기꺼이 포기해도, 여기서 잠깐 멈추어도 좋다고 말한다.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이 행복한 것을 깨닫는다면, 그냥 주어진 삶에 당신은 충분히 ‘재즈스러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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