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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May 03. 2021

기괴의 미학으로 비틀어 끝내 내리꽂는 욕망의 여정

화녀 火女 | 1971 | 김기영 | 98분

당시 영화의 시대상에 통용되었던 단어를 일부 사용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하녀〉로 한국 영화계의 강렬한 인장을 남긴 김기영 감독은 10년이 지난 뒤 1970년대라는 시대상과 여전히 유효한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자신의 이전 영화를 리메이크한다. 기존 시나리오에 많은 수정을 가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1971년 작 〈화녀〉의 흥행에는 단연코 당시 신인으로 첫 영화에 도전한 스물다섯의 윤여정 배우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녀〉와 〈화녀〉, 〈충녀〉로 대표되는 김기영의 ‘여(女) 시리즈’는 물론 당대에도 흥행하였지만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그의 천재성과 영화적 의미를 정리 발굴하며 한국 영화사의 한 지류를 형성한 감독의 대표적인 문제작으로 꼽힌다. 그는 산업화와 근대화, 독재와 억압의 현실적 맥락에서 영화를 통해 자본과 계급으로 얽힌 대립과 파국, 성적 욕망으로 뒤틀린 인물, 특히 이상하고 기괴한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가학성 짙은 자신만의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화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명자가 중산층 가정의 '식모'로 들어가며 욕망을 분출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내용이다. 감독은 흑백의 〈하녀〉를 지나 원색적인 컬러의 〈화녀〉에 붉은 빛을 비춘다. 그는 세 중심인물인 명자와 동식, 정숙을 욕망의 끈적한 구렁텅이에 집어넣고 지독한 파멸의 순간까지 몰아세운다.



서울의 한 중산층 이층 집에서 식모 명자(윤여정)와 주인집 남편 동식(남궁원)이 사망한 채 발견된다. 범인은 곧 경찰서에 잡혀 들어왔고 간밤에 절도를 시도하다 칼을 찔러 죽이게 되었다는 자백을 받아내며 수사는 마무리되는가 했다. 그러나 안주인 정숙(전계현)의 태도를 의심쩍게 본 형사(최무룡)는 그에게 정황을 추궁했고 곧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는다. 1960년 작 〈하녀〉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남성 주인공의 꿈이었다는 미완의 결말을 제시했지만 〈화녀〉는 이미 벌어진 파국의 서사를 정공법으로 직시하며 현실의 기이한 모순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의 광경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서사의 얼개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한 뒤 본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은 모호한 표현주의적 서사로부터 조금은 친절한 방식을 선택한다. 내화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과감하고 독창적인 작법은 김기영 특유의 뒤틀린 상황과 심리 묘사, 강렬한 색감의 대립으로 관객의 예측을 한참 벗어난다. 거기에 중간중간 플래시백에서 외화로 돌아오는 영화의 완급 조절은 간단치 않은 서사에 관객의 한숨을 돌리게 만든다.     

출처 | 다음 영화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고향에서 도망친 후 상경한 명자와 경희(김주미혜)는 서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까마득한 31빌딩을 바라보며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경희는 빠의 여급으로, 명자는 양계장을 운영하는 정숙과 작곡가 동식 가족의 식모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명자가 당돌하며 순수한 특유의 성정으로 고된 식모살이를 이겨내던 중 동식에게 겁탈을 당한다. 성적 순결을 잃었다는 죄책감과 절망도 잠시, 동식은 아내 정숙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명자는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를 경험한다.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에 피폐해진 정신적 트라우마는 그릇된 욕망으로 자라났다. 동식과 아이, 나아가 집 전체를 차지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동식과 정숙 역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거기에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후 분노와 욕망으로 질주하는 세 사람의 세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김기영은 당대 한국 영화계의 틀을 벗어나 특유의 인장과 세계관으로 그로테스크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다. 당시 〈화녀〉와 결이 비슷한 멜로드라마의 중심 관념이란 가부장 전통의 속박과 여성의 정절, 정상가정의 유지와 남성성의 건재였다. 그 안에서 여성의 통속이란 남성이 지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평범한 부녀자로 살아오다 남성의 불륜이나 다른 남성의 등장, 근대화의 혼란 등 특정한 계기로 기존의 삶을 도전받는다. 변화의 시대에 전통 가정의 해체만큼은 단호히 거부하던 사회에서는 아내의 도리에 맞게 갈등과 고난에도 결국 모성애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교훈적 결말이 있는가 하면 유혹을 견디지 못한 불순한 여자가 타락하는 호스티스 영화나 청춘남녀의 애절하고도 순수한 사랑을 그린 로맨스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 안에서 김기영의 멜로드라마는 변화하는 시대 달라지는 여성상을 날카롭고도 파격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는 비유와 변주, 분절된 이미지의 사용은 영화의 비현실성을 극대화한다. 대상의 내면에 갇힌 인습을 과감히 폭로하며 비웃듯이 이를 과장하는 영화적 스타일은 흔들리는 카메라와 극적인 명암, 비현실적 연기로부터 파생된다. 그의 세계에 어울리는 작위적 대사와 행동은 배우의 연기로 구현한다. 시체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는 그 점에서 김기영의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다. 예측 불가의 디렉팅에도 윤여정 배우는 자신만의 기운으로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 파국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버스 안 31빌딩의 거대함에 압도되기는커녕 "떨어져 죽기 편리한 높이"라며 킬킬대는 당돌한 모습은 관객과의 첫인상부터 전형적인 여성상을 철저히 거부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심어준다. 수직으로 높이 솟은 빌딩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공고한 남성성과 계급의식은 명자에게는 그저 농담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 운명을 스스로 내뱉는 통한의 전조는 시대의 억압이 명자의 삶을 그냥 두지만은 않겠다는 역경의 출발선과 같다. 미시정치학을 관통하는 억압 기제에 놓인 영화는 비정상적인 충동과 질투, 살인과 범죄를 다루며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드리운 트라우마를 스크린에 구현한다.     


명자는 태연하게 쥐꼬리를 잡고 흔드는 과감하고 야생적인 모습과 함께 쥐약을 설탕물과 바꿔치기해 정숙의 의도를 간파하는 얄궂은 지적 면모를 드러낸다. 평범한 부녀자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절규하지만 이내 주인집의 약점을 잡고 내면의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감정의 급격한 등락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윤여정의 연기는 순수하고 서늘한 광기로 가득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의 수줍은 몸짓은 곧 욕정과 복수의 감정을 담아 여러 이미지로 폭발한다. 과거 고향에서 동네 남성들에게 당했던 트라우마는 성적 욕망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이를 기괴한 신체의 뒤틀림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삶의 마지막 순간 욕망을 분출하는 명자는 이층 집 계단을 타고 거꾸로 추락한다. 붙잡은 동식의 걸음에 맞춰 계단 계단마다 머리를 찧는 명자의 장면은 비참하고도 강렬한 의지의 각인처럼 뇌리에 남는다. 이상한 여성들의 신체 훼손과 악다구니는 역설적으로 영화 곳곳의 비정상성에서 드러나듯 가부장이라는 거스를 수 없던 억압에 분열된 여성으로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불의 여자’라는 제목이 무색할 만큼 영화는 물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고통과 욕망의 장면마다 물은 명자를 괴롭히는 갈급의 메타포로 사용된다. 공허를 채우는 물은 명자를 가득 메운다. 욕망과 고통의 액체는 곧 독약이자 생명수다. 정화와 죽음, 생명과 파멸처럼 물의 이미지가 가진 다중의 의미는 덧없는 가부장제의 반작용과 변주, 계급의 전복으로 나아가는 김기영식 사회비판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밖에도 나비와 쥐, 닭의 이미지 등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반복하여 인용하는 상징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물질과 생산 기계로 전락한 생명력, 무지의 충동과 위험한 유혹 같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는 개성 있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인간과 사회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노출한다. 윤여정 배우 못지않게 극의 감정과 서사를 지탱하는 정숙 역의 전계현 배우의 에너지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비극을 목도하는 반동 인물로서 정숙은 단지 전통적 여성상으로 신진 여성 명자와 대립하는 일차원적 인물로 남지 않는다. 홀로 양계장을 운영하는 직업여성이자 허울뿐인 가부장의 권력에 순종하는 그는 달리 보면 명자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내보일 기회를 얻는다. 정숙은 뒤틀린 가정의 보호 강박에 사로잡힌 채 사회적 평판이라는 대전제를 위해서라면 가정의 침입자를 언제라도 닭 모이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명자의 친구 경희 역시 전형적인 호스티스 영화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지만 유의미한 장면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숙이 모든 사실을 밝히고 비 오는 거리에 쓰러져 통곡하다 신발 한 짝을 잃는 마지막 장면은 50년 전이라고 믿기 어려운 모던한 연출을 보여준다. 정숙을 부축하는 경희의 뒷모습과 저 멀리 보이는 31빌딩은 억압과 통제의 사회라는 고고한 첨탑은 건재하며, 그 밑바닥에서 욕망을 억누른 채 뒤틀리며 살아남은 여성의 쓸쓸한 걸음만 남아 바뀌지 않는 시대의 모순을 상징한다.




김기영은 자신의 괴팍한 본성을 적극적으로 영화에 표출하며 사회의 무의식을 짓이겨 근대화의 뒤편에 적재된 계급과 성별, 자본을 고발한다. 욕망이라는 절대자를 향한 파국의 행렬 한가운데 인물을 떨어뜨린 그의 결론은 한결같은 추락이다. 닿을 수 없는 갈증의 끝에는 거대한 31빌딩 옥상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에게 영감을 준 김기영의 영화는 윤여정이라는 대배우의 탄생을 열어젖혔고, 영화 속 그의 추락은 50여 년이 지나 지금의 자리에 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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