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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May 09. 2021

완벽한 피해자를 만든 언론이 정말로 비워야 할 자리란

나를 찾아줘 | 2014 | 데이빗 핀처 | 149분

※영화 〈나를 찾아줘〉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명 동화 작가 부부의 딸이자 그들의 대표 작품 〈어메이징 에이미〉 시리즈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던 에이미는 어릴 적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아 왔다.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동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처럼 에이미와 닉의 사랑과 결혼 생활도 순탄하게 흘러갔으면 좋았으련만, 현실은 실전이라는 말은 두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애 시기와는 달리 원만하지 않았던 부부관계와 실직, 부모와 출판사의 갈등으로 권태기를 맞은 그들의 삶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 5주년이 되던 날, 에이미는 사라진다. 에이미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데다 실종한 에이미의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은 닉은 여러모로 미심쩍다. 보다 못한 장인과 장모는 언론에 에이미의 실종을 대대적으로 알린다. 베스트셀러 동화책의 실제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미 전역을 들썩이게 한다. 갈피를 못 찾는 경찰 조사와 달리 언론의 취재력은 날이 갈수록 불이 붙고, 유력한 용의자로 남편 닉을 지목한다. 여론의 의심은 점점 커 가고, 금기야 닉의 쌍둥이 여동생 마고와의 공범 의혹과 불미스러운 추측까지 입방아에 오른다. 그리고 영화는 완벽한 에이미의 모습 뒤에 가려진 실상을 공개한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는 닉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에이미가 벌인 자작극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허구와 사실로 절묘하게 포장해 관객의 허를 찌른다. 감춰진 진실을 풀어가는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영화 속 인물들이 언론과 여론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자식을 찾기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 부모의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언론은 에이미의 석연치 않은 실종을 연일 보도하며 자극적인 뉴스를 쏟아낸다. 그리고 알려진 정황과 추측만으로 닉을 에이미 납치 사건의 용의자로 몰아간다. 그 증거란 이상하게 찍힌 사진과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확대 재생산이다. 반복된 기사와 음모론은 대중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부여한다. 어릴 적부터 미디어에 익숙했던 에이미는 여론의 속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짜 놓았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언론은 닉의 과거 불륜 사실까지 공개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닉 역시 언론을 활용한다. 에이미가 돌아온 후 닉이 토크쇼에 나와 감동적인 액션으로 진심을 연기하자, 다시 여론은 천하의 불륜남이지만 선처해 줘야 한다는 쪽으로 향한다. 영화는 옐로우 저널리즘의 현실을 포착해 서로의 거짓으로 마무리되는 블랙코미디로 언론의 실체를 고발한다.


정확한 사실이 아닌 추측만으로 닉을 몰아세우는 언론은 영화 초반까지만 해도 아내를 잃어버린 비운의 남편으로 소개하던 닉을 얼마 안 가 가정폭력을 일삼고 임신한 아내를 내팽개친 납치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급기야는 그의 가족을 향한 근거 없는 가십까지 발산하는 동안 포커스는 이미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에이미의 실종과 함께 매일 새롭게 드러나는 닉의 사생활과 추측은 그를 점점 궁지에 몰아넣는다. 언론은 알 권리와 정보전달을 구색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자극적인 말들을 늘어놓기만 하면 된다. 사실이든 가짜든 중요치 않다. 밝혀진 사실은 더욱 자극적으로 확대해 대중의 시선을 끌어모으면 그만이다. 잘못된 정보에 달린 합리적 추측이라는 단서가 무색하게 이미 여론의 화살은 방향을 정한 지 오래다.


대중은 욕망과 자극에 열광한다. 흥미롭게 윤색한 언론 기사들은 수 천 건씩 쏟아져 나온다. 이제 사실의 경중을 판단하는 척도는 사회적 중요도와 본질이 아닌 기사와 보도의 양으로 결정된다. 정작 깊이 있는 시선으로 다루어야 할 시의성 있는 사회적 문제는 뉴스 꼭지에서 밀려난다. 시청률과 클릭 수로 경영을 유지해야 할 언론사는 약간의 사실과 대부분의 추측으로 이루어진 사실상 결과를 단정지은 기사로 저마다의 관점을 가진 대중들을 현혹시켜 한쪽으로 몰고 간다. 게다가 스토리도 완벽하다. 어릴 적 한 번쯤은 읽어 본 유명 동화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자 하버드 출신의 미모의 금발 여성, 극적인 러브스토리와 결혼,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드러나는 충격적 진실, 남편의 외도와 폭력, 살해, 유기 등. 이미 기사 타이틀이 일주일 치는 나와 있다. 자극적인 소재를 갖춘 눈에 띄는 캐릭터는 이 거대한 사건의 주인공이 될 탁월한 재목이다. 방송국 카메라와 극성팬들은 에이미의 집에 진을 치고 창문만 들여다본다. '유력한 피의자' 닉의 일거수일투족은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피해자 가족의 딱한 사연은 하루 종일 앵커와 기자를 바꿔가며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닉을 이미 범인으로 지목한 언론 덕에 경찰 수사는 난항을 겪는다. 그의 불륜도 사실로 드러나고, 에이미가 조작하고 떠난 증거도 명확하니, 여론의 방향대로 경찰도 편향된 사고를 유지한다.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수사해야 할 공권력은 필연적으로 언론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적당히 자극적이고, 적당히 사실에 기반한 근거 없는 결론을 미리 풀어놓은 언론에 익숙해진 대중은 '이렇게 중요한 사건에 소극적인 경찰'을 비난하며 수사의 편향성과 음모론을 늘어놓는다. 수사의 원칙과 절차대로 사건을 선별하고 조사하는 과정이 시시각각 세의 주목을 받는다면 대개 벌어지는 일이란 설익은 경과보고서와 자연스러운 수사의 '헛발질화'다. 핵심은 사라지고 안타까운 피해자와 신뢰 잃은 공권력만이 남을 뿐이다. 정작 신뢰를 잃어야 할 곳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피해자 가족의 심정을 깎아내리려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이의 예상치 못한 죽음을 겪은 주변인들은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한다. 모두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에 언론이 과도한 서사를 주입하고 대대적으로 다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공공성의 영역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대중의 흥미나 사건의 극적 전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누군가는 변화가 시급한 사회구조적 병폐에 깔려 숨지고 있고, 작은 목소리의 그들을 크게 다뤄야 할 자리는 충분히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상황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 이물감은 자극적인 소재와 배경, 암묵적인 권력구조, 의미 없는 음모론과 단정적 보도 때문일 것이다. 한강에서 사라진 어떤 이를 향한 이 과도한 이슈 메이킹을 가능케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언론의 몫이 가장 크다.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신중하고 차갑게 사실을 걸러내야 한다. 아픔과 분노를 날것으로 전달해 개인의 감정을 악용하거나, 극적인 장면으로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직조한 언론의 행위는 의심과 원망의 대상을 이미 상정한 폭력과 다름없다. 거대한 말들의 흐름에 책임은 점점 조각나고 있다. 바뀔 생각은 없어 보이는 언론 때문에 이미 자리가 찰 대로 차 넘쳐버린 공간을 비집고 언론 소비자인 우리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의식적으로 기사를 소비하지 않으려 해도 여전히 계속되는 가십과 의혹에 단호히 관심을 접고, 정말 알아야 할 현상을 찾아 절차와 사실이라는 기준에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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