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창작소설
그건 분명히 쥐의 소리였다. 다다다, 짧은 다리를 가진 무언가가 뛰는 소리였다. 거기에 음침하고 더러운 곳에서 들려올 법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내가 처음 창고에서 들은 쥐의 소리는 ‘찍찍’이 아니었다. 쥐는 그보다 길고 둔탁하게 울었다. 그 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했고 점점 무뎌졌지만 아무렇게나 엉키어 있는 철사 뭉텅이에 뒷다리가 끼어 발버둥을 치는 쥐를 본 이후 나는 처음 쥐의 소리를 들었던 충격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점장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소한 부분을 까칠한 태도로 지적하는 차장의 불시점검이 항상 불만이었다. 차장은 성과나 인사평가 기준표를 점장의 눈앞에서 휘저으며 조직과 개인별 목표가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반복해서 설명했다. 점장은 차장이 본사로 돌아가면 매장직원을 불러 모아 본인의 오랜 침묵으로 시작하는 미팅을 열었다. 점장은 “잘 부탁드립니다” “진짜로 제가 부탁 한번 드리겠습니다”라며 하소연하는 모양새로 포장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화풀이였다. 직원들을 불러 매대 앞에 빙 둘러 세우곤 10분이 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위로를 바라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점장은 있지도 않은 발주를 핑계로 나에게 차장의 수행을 떠밀었다. 조금 전도 앞장선 차장의 구두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쥐 소리임을 나는 직감했다. 차장이 일주일 전부터 위생점검을 한다며 엄포를 놓은 날이었고 나흘 동안은 나타나지 않아 안심했던 쥐가 때마침 뛰어나온 것이다. 나는 빠르게 차장의 눈치를 살폈고 시선과 어깨를 떨구어 변명의 말을 만들었다. 마감조로 근무한 다음 날 휴무도 반납하고 오전부터 매장 구석구석을 왁싱한 이야기와 어디선가 매번 미리 전해 듣는 검열(정식 명칭은 아니었지만, 차장은 이 말을 꽤나 즐기며 사용했다)에 맞게 휴무를 써버리는 농산품 담당자 대신 창고 구석 썩은 배춧잎을 치웠다는 변명 중 어떤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때 차장 옆에서 동행하던 사람에게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들려왔다.
-진선아, 이진선 맞지?
이담당이나 공산담당으로 불리는 게 익숙한 곳이었다. 위생검열로 차장에게 깨지기 직전에 들리는 내 이름에서 낯설지만, 안도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창고에 들어가기 전부터 낯이 익었는데 내 명찰을 보고 확실히 알아차렸다고 반갑게 말했다. 검열 시작 전 차장은 우리 회사의 최연소 과장이며 짱짱한 업무능력을 가졌고 앞으로 자주 볼 것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본사 쪽 직원은 검열 때 말고는 마주할 일도 없었고 언뜻 보면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 과장이라니. 그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식하지 않은 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차장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 아, 대학 다닐 때 같은 글쓰기 동아리 했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 이 담당도 이 과장 알아?
뜻밖의 순간에서 등장한 구원자가 같이 글쓰기 동아리를 했던 사람임을 듣자 안도의 기운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나의 대학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순간의 위기 모면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작년 겨울부터 아버지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졌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이 증상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입맛이 없다며 간헐적으로 생존을 위한 음식만을 섭취했고, 일주일 동안 허연 죽만 간신히 넘기다 8kg이 빠지고 나서야 집 주변의 자주 가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의 머리는 이마가 넓게 보일 정도로 벗겨져 있었는데 주름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피부는 창백한 하얀빛이 도는 사람이었다. 나는 의사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첫인상은 온화한 편이었으나 코와 미간을 습관적으로 찡그려서 마주할수록 신경질적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의사 특유의 불친절함이 나이가 들어 자연히 찾아오는 노화를 늦추는 방안을 묻는 노인들의 잦은 방문 때문일 것으로 짐작했다. 나와 아버지는 비염으로 고생하는 환절기마다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비염은 약을 아무리 먹어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말로 우리를 다그치곤 했다. 먼지의 온상인 에어컨을 멀리하고 홍삼 등으로 체질 개선을 하는 한방적인 치료를 권했다. 의사는 천천히 그러나 희미한 공격성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어투로 자신의 최소한의 본분만을 유지하려 굴었다. 아버지는 그런 의사를 좋아했다. 나는 그것이 자격을 갖춘 사람의 불친절한 진찰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고 싶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조심스럽지만 뇌종양이 의심됩니다.” 그날도 그저 그런 불친절한 위로를 받고자 했던 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의 진찰을 권유받았다. 처음 보는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의사의 태도는 아버지에게 나름의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그렇게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아버지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의 의사는 동네병원의 의사보다 더 지쳐있었다고 했다. 머리는 언제 감은지 모를 정도로 뭉쳐 있었고 말의 중간중간 하품이 섞여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고 어머니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흥미로운 사실을 기억해 낸 것처럼 나에게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의사는 뇌종양이 생기면 흔히 신체 한쪽의 마비나 경기를 보이는데 아버지에게 그런 증상이 없었는지 물었다. 직업 특성상 오래 서서 반복하는 작업을 해서 손발이 저리고 감각이 순간순간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했다. 의사는 뇌 바닥 쪽에서 시작된 종양 탓에 anosmia, 즉 후각 소실이 온 것이고, 뇌종양의 40% 정도는 중이염이나 축농증의 염증에서 시작된다며 아버지에게 비염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저는 체질 개선을 위해 홍삼과 말린 돼지감자를 꾸준히 먹어오고 있는데요” 그것은 아버지가 그날 병원에서 했던 유일한 말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병이 동네병원의 불친절한 비염 처방 탓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그 뿌리를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오는 억울함의 표현이겠구나 생각했다.
과장의 뜻밖의 구원 이후 차장은 더는 창고 검열을 진행하지 않았다. 창고 앞에서 차장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두 손 모아 받더니 본사로 넘어간다고 했다. 차장은 과장에게 평가를 대충 마무리하고 퇴근하라 지시했다. 그는 회사규율이 중요하다는 말을 달고 산 사람이었지만 나는 회사 내규 어디에도 신입과장(정확히는 예정자인 사람)이 위생점검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 아직도 하고 있어? ‘어쩌다 쓰려고’ 맞나?
함께 동아리를 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라 그와 말을 편하게 했었는지 곱씹어보았다. 끝내 기억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직장 상사격이고 나이도 한두 살 위의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나는 말을 높였다.
- 아뇨. 오래전에 끝났죠. 지금은 그때 만난 우림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 그 회장 친구 맞지. 좀 이상한 애 아닌가?
대학 시절 나는 글쓰기에는 영 취미가 없었지만, 음악칼럼니스트를 준비하던 과 선배 하나가 글 쓰는 모임을 추천해 주었다. 나에게 음악은 일상이었지만 직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꿈을 가지는데 현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워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에 순응하는 나의 모습이 두려웠던 때였다. ‘어쩌다 쓰려고’라는 이름에 맞게 규율과 형식도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고 읽는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는 고민의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동아리는 생각보다 더 어쩌다 쓰려는 사람들이 모였고 카톡방에 올라온 모임 참가 수요조사에는 매번 3명 남짓의 사람들이 투표했다. 보통은 나와 신입 과장과 회장인 우림이 카페에서 만나 문학을 이야기 하다 해가 지면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곱씹을 정도로 유쾌한 술자리는 아니었고 우림이가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장면 정도가 기억에 남았다. 가끔 카톡방에 글이 올라오면 우림은 열정적으로 글을 읽고 평가했다. 보통은 일기에 가까운 수필이 대다수였지만 우림은 프로이트나 라캉의 말들을 끌어다 글의 분량을 훌쩍 넘긴 길이의 비평문을 올렸다. 나는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글을 쓴 사람은 늘 이모티콘이 섞인 감사 인사를 카톡방에 올렸다. 우림의 글을 올린 이후 나머지 부원들은 가슴이 따듯해지는 글이고 인생에 위안을 받았다는 말들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렇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과장이 제일 먼저 카톡방을 나갔다.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카톡방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결국, 나와 우림만이 카톡방에 남았고, 그때 우림은 ‘어쩌다 쓰려고’의 끝을 선언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우리의 글들은 모두 각자의 벽돌이 되었고 하나의 벽을 이루었다는 문장으로 글은 시작되었다. 우림은 글의 끝에 엄숙히 모임의 종말을 고하지만 우리의 벽돌들이 담긴 카톡방은 없애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 방을 나가지 않았지만 우림과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 내가 동아리 나가기 전쯤, 회장이랑 둘이서 술 한잔하면서 그때 키우던 고양이 영상을 보여줬지. 그런데 그걸 보고 표정이 섬뜩하게 굳더니 존나 못생겼다고 했던가. 아무튼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구석을 숨기고 있는 느낌이었어.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과장이란 사람에게 동거인의 근거 없는 험담을 듣는 것이 불쾌했다. 나의 불만이 논쟁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고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최선의 반응을 보이는 선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커피와 담배로 잠시 어색한 시간을 보냈고 나를 침묵으로 앉혀둔 과장은 평가지를 작성했다. 다 작성한 과장은 가봐야 하겠다고 일어서며 나에게 평가지를 건네주었다. 꼼꼼하게 읽어보고 후속 조치는 점장 선에서 보고하면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과장에게 퇴근하는 것인지를 물으며 버스를 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과장은 본사에 들어가 차장에게 보고한 후에 퇴근할 것이고 차를 타고 왔다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걸어가던 과장은 잠시 멈추고 돌아서 “그 친구 조심해”라는 말을 남겼고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나는 끝까지 바라보았다.
매장으로 돌아와 점장에게 평가지를 건네고 우림과 나만 남아있는 ‘어쩌다 쓰려고’ 카톡방에 들어가 선언문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때 점장이 위생점검 평가지를 나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놈의 회사는 씨팔 다 적이야 어떻게. 동료의식이 없이 동료의식이. 너는 쥐새끼 하나 못 막고 뭐 했어? 이 새끼야” 나는 떨어진 평가지를 주워들었다. 비고란에 정갈한 글씨체로 ‘창고에 쥐 다수 출현. 위상상태 점검 후 후속 조치 보고 요망’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나는 커피가 섞인 침을 매장바닥에 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아버지는 수술 대신 어머니의 고향인 통영의 욕지도를 가기를 원했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동네를 넘실거리는 곳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는 대학병원은커녕 번번한 동네 의원도 없다며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다. 뇌종양을 진단한 의사는 어머니를 따로 불러 환자가 극단적으로 우울증 증상을 보이며 소심해지거나 반대로 난폭한 성향을 보이며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때 의사는 여전히 하품을 멈추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그저 많이 피곤하시겠네요 하며 의사를 위로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심한 무기력증을 겪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한없이 말을 아끼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다행히 어머니는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정도로 서로의 삶을 충분히 공유했고, 그들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누군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통영 시내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욕지도로 함께 떠나기로 두 사람은 생각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나에게 바다의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었다. 어머니에게 바다는 우울함을 가득 머금고 있는 존재였다. 그 안에 뛰어들어 아무리 헤엄쳐도 그 끝자락에 닿을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바다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공유할 사람들의 생애를 통째로 삼켜버리고도 미동하나 없이 평안했다. 어머니의 경험은 바다를 향한 두려움으로 번졌고 어린 마음에 사람이 가득 들어서 파도가 넘어서지 못할 가장 확실한 공간인 서울로 향하길 결심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대로 지어온 농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울로 상경했고 청바지, 통기타, 맥주로 요약되는 서울의 번잡한 명동거리에 그들은 빠르게 녹아들었다. 두 사람은 홀로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지만 남은 시간은 명동의 다방에서 주로 보냈다. 그 공간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함께 채웠다. 고향을 떠나온 서울을 즐겨야만 했던 그들에게 다방은 새로운 정서를 수용하기 가장 손쉽고 고급화된 방식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대학생이 주로 찾는 다방을 시작으로 영화배우, 문인들이 드나드는 다방을 거쳐 마지막에는 고전음악을 틀어주는 다방에 정착했다. 예술인이란 사람들이 담배를 태우며 문학이나 음악의 가치를 논쟁하는 공간을 그들은 술에 취할 때면 종종 회상했다. 그들이 묘사하는 다방의 벽면은 레코드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ABC 순서대로 정리된 레코드판을 오랫동안 보았지만, 그들은 클래식 작곡가의 이름은 하나도 외우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 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정정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방의 분위기에 누구보다 심취하여 감동했다. 두 사람은 83년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반도체 산업의 흐름 속에 반도체 회사에 취직했고 당시를 아직도 “운이 좋을 때”로 회상했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두 사람이 함께 서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탱을 해준 고마운 공간이라고 했다. 그들이 클린룸이라 불렀던 그곳의 이야기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듣고 자랐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고 나는 서울에서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본사에 지방발령 신청을 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점장의 질책이었다. “입사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매장을 옮겨... 해준 게 얼만데…. 내가 인턴까지…. 됐다, 됐어” 말을 할 때 중간중간을 끊는 것은 점장이 자신이 화를 참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점장은 자신의 말을 잘 듣고 그에 따라 일을 처리할 사람이 좋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처음 점장을 만난 것은 2년 전 겨울이었다. 몇 년 만에 찾아온 아린 혹한이었다. 그때의 나는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전엔 매장에 물건들을 진열하고 그날의 할인상품 목록을 뽑아 정리해 상품들 앞에 끼워두어야 했다. 나에게 주어진 그보다 중요한 일은 화물차에서 매장까지 물품들을 옮기는 롤카트를 끌거나 미는 일이었다. 오전에는 육류, 유제품과 농산품이 함께 들어오는데 모두 무게가 나가는 것들이었다. 점장은 처음 만난 나에게 본사에서 내려온 예산을 쪼개어 아르바이트를 쓰는 거라며 성실하게 근무할 것을 주문했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에는 나에게 본사 지침상 4대 보험 의무 가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최소 근무시간만 일할 수 있다고 했고 주 59시간 안에서 요일별 근무시간 조정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선택할 때 시급이 높고 남은 시간 활용이 가능함이 우선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오후가 조금 넘게까지 일하고 남은 시간 동안 다시 음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두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계약서에는 따로 적지 않은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두 번째 달부터는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등본과 통장사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 달 이상 근무할 경우 사대보험을 의무적으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점장은 설명했다. 친구보다는 가족이 좋을 것 같다며 나에게 형제가 있는지 물었다. 형제가 없었기에 카톡방을 뒤지며 부탁할 수 있는 친구를 찾는 나에게 점장은 친구는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라며 자신이 겪은 배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는 결국 가족 또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며 절대 돈 문제로 엮여서 좋은 사람이 없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점장과 대화를 할 때 뱉어버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해 뉴스에는 유난히 많은 블랙 아이스 사고 소식이 나왔다.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겠지만 나의 기억에 유독 오래 남았다. 화물차에서 롤카트를 내리는 엘리베이터 앞 공터는 건물의 북쪽이었기에 오전에 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슥슥 밀려버리는 바퀴는 나의 신경을 늘 곤두서게 했다. 특히 그 공터는 주차장을 겸하고 있어 주변 아파트의 주민들 차가 주차된 경우가 많았고 카트를 밀고 끌 때면 차와 닿지 않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한겨울 오전에도 나는 온몸을 적실 정도로 땀을 흘렸다. 장갑을 끼면 손이 둔탁해져 카트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힘들어 맨손으로 철제소재 카트를 만졌는데 그 한기가 발가락 끝까지 쭈뼛거리며 퍼지는 것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처음 근무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 누구의 서류를 가져올지 결정해야 하는 날의 오전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차 한 대가 작업 반경과 가까이 주차되어 있었다. 지래 걱정이 되어 차량 앞 유리에 부착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날 새벽 나는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쉽게 잠들지 못해 근무 때 유독 피곤했다. 새벽 4시경 쉴새 없이 울리는 카카오톡 알람 소리가 잠을 깨웠고 나는 잠들기 전 무음모드를 설정해두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며 반쯤 감긴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몇몇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지금 첫눈이 내린다며 각자 찍은 사진을 첨부해 전송하고 있었다. 언제 한번 만나는 날을 잡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카톡방에서 이전에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커튼을 걷었다. 아주 작은 눈송이들이 중력에 저항하며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모양새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우림과 있던 단톡방이 숫자 1의 알람과 함께 맨 위로 떠 올랐다.
- 첫눈이 내립니다. 어쩌다 그렇게 첫눈입니다.
그렇게 첫눈이 내리던 날 내가 밀던 냉동육류를 실은 롤케이지의 바퀴는 헛돌았고 그날따라 유독 신경이 쓰이던 차량 쪽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케이지를 반대 방향으로 힘껏 차면서 넘어졌고 그 관성으로 케이지 위에 있던 냉동된 육류들이 나의 다리로 쏟아져 내렸다. 돌보다 더 단단하게 굳은 고깃덩이를 받아내고도 나의 신경은 온통 차에 흠집이라도 나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에 쏠려 있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차 앞문 손잡이 쪽에 부딪힌 탓에 도난방지 경고음이 무섭게 울려댔다. 이른 시간 안에 나타난 차주는 누워있는 나에게 차의 어느 부분과 부딪힌 것인지 꼼꼼히 따져 물었고 점장과 함께 블랙박스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일 똑바로 하라는 손가락질과 함께 사라졌다. 그날 내린 눈으로 고기를 감싸는 박스가 젖어있었고 고기의 부피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상자가 맨 먼저 다리 위로 떨어져 뭉쳐지면서 다리를 보호해주었다. 병원에서는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고 그것은 어딘가 차는 힘으로 생긴 것이라 했다. 간단한 수술을 해야 하지만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날 점장은 본사에 연락해 내가 사대보험을 들 수 있는 계약직 채용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이후 나에게 전화를 건 점장은 다음 달에 있는 회사의 인턴모집에 지원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매장에서 인턴지원자가 나오면 성과평가에 반영되었고 사대보험에 가입하게 해주는 대신 내가 인턴에 지원하길 바랐다. 나는 그것을 묻는 점장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우림과 다시 연락한 것은 그가 SNS에 올린 글을 본 후였다. 우림은 자신이 사는 집의 위치와 월세를 첨부한 사진과 ‘함께할 룸메이트 구합니다. 월세를 나누어 내는 것 외에 특별한 조건 없음. 굳이 하나를 더한다면 호칭 정리’라는 짧은 글을 올렸다. 어머니는 통영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집을 구해야 했다. 우림의 집은 직장과 접근성도 좋았고, 월세도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우림에게 연락해야 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결국 ‘어쩌다 쓰려고’ 톡 방에 어색한 안부 인사와 함께 아직 룸메이트를 구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호칭 정리가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림에게 답이 왔다.
- ㅇㅇ.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면 됨
우리는 동아리를 할 때 주로 만났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본 우림은 살이 한참이나 불어있었고, 머리는 언제 자른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고 간신히 눈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눈에 띄는 점은 정수리 근처에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크기로 머리가 빠져있었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탈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했고 이미 우림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아 따로 묻지 않았다. 우림은 커피가 나오자 나에게 룸메이트를 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우림은 서울시에서 실행하는 청년행복주택 정책을 통해 집을 구했다고 했다. LH 전세임대주택을 신청하고 싶었지만, 지원하기 위해서는 등본상의 주소가 대학의 소재지와 다른 시,군 출신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우림이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지역에 살고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떤 학과를 전공하는지부터 졸업 여부까지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았다. 동아리를 할 때 우림은 언제나 대화를 주도하며 많은 말을 했지만. 사적인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우림은 역사나 철학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특히 현대사 이야기는 언제나 지금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나는 우림과 함께 살아도 큰 문제가 없을지를 우선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우림의 설명은 (강의와 더 가까워 보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별로 관심도 없는 서울시의 주택정책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우림은 자신의 행복주택 지원 우선순위가 3순위까지 내려가게 된 이유가 지역주민들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우림의 본가가 있는 동네에서는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결사반대를 외치며 시위한 탓에 행복주택 건설이 무산되었다고 했다. 행복주택이 본가와 같은 구라면 1순위, 같은 광역시라면 2순위의 우선 공급자로 선발되지만, 자신은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3순위까지 밀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3순위에 지원했고 정말 천운이 닿아서 (우림은 이 부분을 유독 강조하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당첨되었지만, 이후가 더 큰 문제라고 했다. 부동산에 행복주택을 문의하면 반갑게 받던 전화도 곧 달갑지 않은 태도로 바뀌어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로 전화를 끊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결국 우림은 직접 블로그를 뒤져가며 대상 주택을 찾아다녔고, 우연히 청년주택이 있는 동네 부동산 아주머니와 친해지며 간신히 계약에 성공했다고 했다. 그마저도 조건이 좋은 집은 아니었고 월세 지출이 제 생각보다 많아지면서 룸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LH 전세임대주택의 경우에는 동거인이 함께 계약하면 전세지원금이 늘어나지만, 행복주택은 해당 사항이 없으므로 나에게 별다른 서류절차 없이 함께 살아도 된다고 했다. 이어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 당선이 주택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려고 하자 나는 우림의 말을 끊고 물었다.
- 같이 살려면 너를 작가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우림은 여전히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고 했다. 한가지 직업으로 자신은 완전히 만족하며 평생을 살아갈 수 없고 다양한 직업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고 했다. 당장 내일은 다른 꿈을 갖고 싶을 것 같아 소설가로 확정한 것은 아니고 우선 이루고자 하는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러기 위해 함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자신을 작가라 부르기를 바란다며 작가는 세상의 곳곳의 모습을 통찰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더했다. 그날 우림과 만남 이후 나는 그와 함께 사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나는 꿈에 대해 고민했고 그동안 일상이자 당연하게 여겨왔던 음악이 나의 삶을 지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선배의 추천으로 시작한 글쓰기 동아리에서 만난,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기를 자부하는 회장이 나의 미래에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운명론적 기대감에 쌓여있었다. 물론 그와의 동거를 결정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직장과 가까운 거리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서울은 그들이 적응해야 하는 궁극의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의 접하는 예술, 특히 음악은 언제부터인가 이유를 따로 묻지 않는 절대 선의 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며 자신들이 정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공간을 향한 동경은 그저 가까이함에 만족하며 묘한 소속감에 젖는 것에 그들을 머물게 했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집을 포기하지 못했다. 기흥구에 새롭게 건설된 반도체 공장은 직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약속했고 그들은 그곳으로의 근무를 지원했다.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두 사람은 시간이 나는 대로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드뷔시의 음악을 들었다. 가끔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었지만, 그들이 가장 즐겨들었던 것은 드뷔시였다. 그들은 다방에서 듣기 좋은 노래가 나오면 늘 수첩을 꺼내 레코드판 커버에 있는 제목을 메모해두곤 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는 클린룸에서의 3교대, 때로는 2교대의 근무를 버티며 서울에 작은 집 하나를 장만했고 그 안에서 나는 악기를 하나씩 배워나갔다. 피아노를 시작으로 바이올린, 오보에를 거쳐 나중에는 장구나 가야금까지 배웠다. 그들이 알고 있는 악기를 전부 가르치기에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되자 주민센터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악기강습을 나와 함께 찾아다녔다. 두 사람의 휴가는 모두 그런 방식으로 쓰였다. 어렸을 때의 나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해주었던 것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배웠던 악기는 흥미보다 일상에 가까웠고 그것이 당연한 삶의 목표가 되었다. 나는 한 번도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온전히 빠져드는 순간도 없었다. 음대를 진학하고 가장 처음으로 그들에게 물었던 것은 ‘내가 음대를 가서 좋은가’였다. 그들은 좋다고 했고 이후로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들과 공유하지 못했다. 그들에게선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그들의 MP3에 들어있는 음악을 함께 들으며 곡을 설명해주곤 했다. 두 사람의 근무가 엇갈릴 때면 한 사람씩 서울의 집을 찾아왔고 맥주캔을 하나 들고 나를 마주 앉아 음악가의 이야기나 음악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잠이 들 때까지 나는 바로크시대 음악의 특징이나 차이콥스키의 생애 등을 아는 대로 설명했고, 식탁에 엎어지기 직전의 그들을 깨워 침실로 향하면서 음악 강의가 끝나곤 했다. 여전히 그들은 클래식 음악가의 이름을 외우지 않았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음악을 그만둘 수도 있다고 느낀 결정적인 사건은 2학년 때의 한 전공 수업 때 일어났다. 사소한 것이란 걸 알았지만 나는 그때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점장에게 잘못 이야기를 꺼냈다가 한 시간 동안이나 20대가 꼭 가지고 살아야 할 인생에 대한 책임의식을 주제로 일방적인 강연을 듣기도 했다. 한 작곡과 전공 수업 교수가 인상주의풍의 작곡을 하는 과제를 낸 적이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업인 데다 큰 흥미가 없었던 나는 드뷔시의 알려지지 않은 곡을 조만 바꾸어 제출했고, 교수는 나의 과제를 두고 음대생이 한 작곡이라고 볼 수 없다고 평했다. 올해 수강생의 최악의 작곡으로 나의 과제물을 선정해 다른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찾아간 교수에게 드뷔시의 곡을 과제로 제출한 것을 밝히자 교수는 다음 날 그 수업에서 나를 제적시켰다. 내가 1학년 때부터 교수는 은연중에 자신에게 따로 불법 레슨을 받는 방법을 흘렸다. 내가 학비를 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학생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나서야 교수는 아무에게나 무책임하게 흘리던 레슨 제의를 나에게서 멈추었다. 나는 1학년들은 필수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교수의 연주회에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학부생들에게 교수의 공연은 무료가 아니었다. 교수 자리 유지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연주회는 일정 수요 이상의 입장권 예약이 없으면 대관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교수가 미리 표를 구매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재판매하는 관례가 있었다. 1학년 학생대표는 송금하지 않은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업무였고 나는 그들을 피해 다녔다. 결국 전공 수업에서 마주친 그들을 나는 끝내 그냥 돌려보냈다. 당시에 푯값을 낼 정도의 여윳돈이 없었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연주회는 돈을 내면서까지 보고 싶은 끌림이 없었다. 연주회 이후 교수는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음대의 전공 수업보다 다른 과의 수업을 더 열정적으로 듣는 것으로 소문난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과와 진로에 대한 고민을 늘어놓는 나에게 집안의 재산 규모를 먼저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일찌감치 작곡으로 돈을 벌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선배는 1학년 때 전공 교수와의 상담에서 취업 관련 정보를 물었을 때 교수가 직접 학교 작곡과 홈페이지를 들어가 교육목표를 크게 읽어주었다고 했다. 선배와 같이 확인한 홈페이지 상단의 배너에는 ‘문화시민을 양성해 국가 인류사회에 문화봉사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로 적혀있었다. 그런데도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선배는 음악칼럼니스트라는 새로운 꿈을 찾았다고 했고 음악전공을 듣는 것은 나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고 글쓰기는 어디서나 기본이 될 거라며 나에게 글쓰기 동아리를 추천한 것이 우림을 만난 시작이었다.
우림과 함께 사는 삶은 꽤 만족스러웠다. 점장이 신입으로 교체된 농수산품담당자 교육을 떠맡겨 근무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그때의 나는 피곤했고, 집으로 돌아온 내가 우림에게 뭔가를 묻거나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림은 자기의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고, 내가 음대를 그만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것이 좋았다. 우림은 건물주인이 건물과 그 앞 공터를 직접 청소하는 지독한 짠돌이라고 했다. 우림은 한번 방으로 들어가면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집안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거실 불을 꽤 오랫동안 켜두었던 어느 날 집주인이 문을 따고 들어와 불을 끄는 것을 방안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고 했다. 우림은 집주인이 나가자마자 전화를 걸어 무단침입은 범죄이며 방안에 내가 있음에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따져 물었다. 집주인은 일주일 내내 꺼지지 않는 불을 창문 너머로 보고 깜빡 잊고 방을 오래 비워둔 것으로 생각해 우림의 전기세를 아껴주려고 그랬다고 했다. 우림은 자신이 직접 내는 전기세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며 이런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될 경우 경찰을 부르겠다는 엄포를 놓고 전화를 끊었다는 일화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최근엔 집주인이 일주일 동안 여행을 떠나는 길에 건물 전체의 세입자에게 계단에 쓰레기나 오물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당부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이럴 거면 관리비는 왜 받는지 모르겠다며 우림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투덜거렸다. 우림은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늘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계속 검색하고 읽었다. 책도 몇 권 쌓아놓긴 했지만 읽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노트북은 우림이 소통하는 세상의 크기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감조와 주간조를 불규칙하게 이동하며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우림은 깨어 있었다. 잠을 언제 자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우림의 노트북에는 언제나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가 동시에 펼쳐져 있었다. 우림은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빠르게 두드렸고 마우스로 무언가를 클릭했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빼놓고는 우림은 주로 특정 집단에 대한 가치관과 그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했다. 나는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들이 많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중에 나는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인권운동에 대한 우림의 생각을 오래 기억했다. 우림은 인권운동을 하며 함께 연대해 투쟁하지 않고 상황을 회피(우림은 꼭 이 말을 여러 번 강조해서 사용했다)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비판했다. 세상의 비정상적인 가치는 약자의 연대와 투쟁으로 언제나 바뀌어 왔고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아야 투표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숨을 몰아 쉬어가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때 문득 통영으로 내려간 아버지의 수술이 잘 끝났는지 궁금해졌다.
두 사람이 근무하던 클린룸에서 입는 하얀 옷을 방진복이라 부른다 했다. 그들의 근무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결점의 청정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냄새가 풍겨온다고 했다. 아버지가 후각을 잃고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냄새를 맡지 못하면 알 수가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주 지독하고 역겨운 액체의 냄새를 꼭 맡아야만 한다고 했다. 감광액이라 불리는 액체는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클린룸 안에서 유리병에 담겨 옮겨지고 자주 깨진다고 했다. 나는 깨지지 않는 병에 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물었지만 그들은 플라스틱에 담았을 경우 내용물의 품질이 변하기 때문에 공장에서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답했다. 감광액이 깨졌던 날에는 그들은 집에서 더 많은 술을 마시고 더 오랜 시간 음악을 들었다. 아버지가 후각을 완전히 잃은 것 같다는 사실을 처음 말하던 날의 어머니는 음악을 듣다 취해 식탁 위에 완전히 엎어져 버렸다. 나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침실로 옮겼고 그때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아빠가...찌들고 눅눅해진... 바다의 냄새를 맡고싶대... 논사람이... 무슨 바다는” 나는 취한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원래부터 비염이 심해서 냄새를 종종 못 맡았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결국 삼켜 넣었다.
내가 우림과 살던 집의 복도에서 보았던 그것은 죽은 쥐었다. 마트 일이 끝나고 집에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복도의 끝에 회색빛의 덩어리가 보였다. 내가 우림과 사는 4층에는 총 3개의 문이 작은 복도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401호였고 가장 멀리 떨어진 403호 문 바로 앞에 쥐가 놓여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은 쥐가 있었다. 끔찍하게 보기 싫은 것을 마주한 나의 시선은 정말 쥐가 맞는지 의심하며 오랫동안 그곳에 멈추어 있었다. 창고에서 보았던 다리가 끼어 버둥거리는 쥐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지만, 문득 계단을 더럽히지 말아 달라는 집주인의 경고가 떠올라 화장실로 향했다. 집에 들어와서도 나는 그 잔상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 쥐의 꼬리에는 털이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매끈하고 긴 모양의 꼬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주름이 잡혀있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몸통의 털은 군데군데 뭉쳐져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그 사이사이 둥근 모양으로 털이 빠져있는 곳에는 허연 가죽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쥐를 보고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몸에 상처를 입고 눈앞의 문을 넘어서지도 못한 채 입을 닫고 힘없이 누워있는 모습이 똑 닮은 사람이었다.
우림도 쥐를 보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외출한다는 것을 알고 신기함을 느꼈다. 우림은 자신이 보고 있던 노트북 화면에 있는 쥐와 전염병의 관련성을 조명한 논문을 가리키며 나에게 보고 싶은지 물었다. 죽은 쥐를 본 이후로 진이 빠진 나는 그것을 보기를 거절했다. 우림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증후군출혈열이나 렙토스피라증 등의 전염병의 위험성을 말하며 쥐가 얼마나 위험하며 혐오스러운 것인지 설명했다. 이어서 쥐의 처리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집주인에게 있는 것이라 주장했다. 집주인에게 청소업체를 불러 처리하라고 연락하는 것이 관리비를 지출하는 세입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라 했다. 우림은 두 번째 처리의 책임은 403호에 있다고 했다. 복도는 3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책임이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은 불명확한 책임이라 했다. 쥐가 한 가구의 문과 더 가까워졌기에 그것을 치워야 하는 책임도 403호가 자연스럽게 더 커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의 책임은 고양이에게 있다고 했는데 우림은 이 부분에서 설명하는 것을 멈추고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이야기였고 마트 일로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일 일어났을 때는 쥐가 사라졌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우림은 책임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길 내심 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우림의 눈을 피하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다음날에도 쥐의 사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죽은 쥐가 그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다. 403호에 있던 것이 402호 앞으로 이동한 것이다. 쥐가 이동한 동선으로 추정되는 부분에는 꾸덕꾸덕하게 굳은 피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땐 쥐가 사라졌기를 바랐다. 점장의 위생 개선 노력의 하나로 창고에 설치한 쥐덫에 쥐가 잡혔다면 새로 들어온 농산품 담당이 미리 치워두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이후 내가 이토록 쥐를 싫어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했다. 어린 시절 실물의 쥐를 마주한 기억도 없고, ‘미키마우스’나 ‘톰과 제리’ 속의 쥐는 ‘찍찍’ 우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우림이 말해주었던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앓아본 것도 아니다. 왜 쥐가 나에게 소름이 끼치도록 혐오스러운지 끝내 답하지 못했다. 그날 서울의 하늘은 선명했지만, 그 위를 파스텔로 덧대어 칠한 듯 여러 색이 그 경계에서 오밀조밀 섞여 있었다. 어느 날 정신없이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쥐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어떨지 상상했다. 쥐가 말하고 쥐가 지하철에 오르고 쥐가 계산하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면? 쥐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나를 거울로 마주하는 것까지 상상이 이어지자 나는 침을 삼켜넣으며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퇴근 후 돌아오는 길, 빌딩 입구에서 나는 무언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딘가에 붙잡혀 목울대가 꽉 눌린 상태에서 밀려 나오는 소리였다. 순간 창고에서 낮고 길게 들렸던 쥐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수백 마리의 쥐가 한꺼번에 계단을 타고 내려와 나를 향해 쏟아지는 망상에 휩싸였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다리를 붙잡고 계단을 조심히 오르는데 그곳에서 이사 후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우림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수리 근처에 보이는 원형탈모로 한눈에 우림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걸어온 소리를 들은듯한 우림은 나를 향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리곤 당황한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작은 고양이의 목덜미를 꽉 쥐고 있었다.
- 뭐 하는 거야?
- 402호에 있던 쥐가 오늘 우리 집 앞까지 옮겨져 있더라고. 처리의 책임이 3순위까지 내려간 거지. 길고양이들이 쥐를 잡아먹지 못하니까 이렇게 죽은 쥐가 돌아다니는 거야. 그래서 처리하라고 데리고 왔어. 근데 죽은 거라 그런지 통 먹지를 않네.
우림은 말하면서도 고양이를 놓지 않았고 집 앞에 놓인 쥐의 사체에 계속에서 고양이의 입을 가져다 대는 것을 반복했다. 고양이는 발톱을 세우고 낮고 길게 그리고 한껏 사납게 울었고, 잇몸이 드러나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우림을 바라보다 문득 그에게 침을 뱉고 싶어졌고 그렇게 잠시 우림을 바라보다 아주 천천히 말했다.
- 하... 작... 가... 새끼
- 뭐라고?
- 작까라고 이 새끼야. 못들었어? 너 작까라고 작까. 작까, 작까 잣까라 이 새끼야
그렇게 큰소리를 내버린 나는 우림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이 떨려 들고 있던 핸드폰도 떨어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로 주저앉아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그때 방안에선 쥐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 맡아보는 결의 냄새였지만 나는 그것이 쥐에게서 나는 냄새라 확신할 수 있었다. 더럽고 음침한 냄새는 아주 진한 농도였고 방 안의 공기를 꾸덕꾸덕 누르며 퍼져갔다. 나는 헛구역질을 하다 먹었던 저녁을 방안에 모두 게웠다. 방문 밖에서는 우림이 문을 두드리며 자신이 욕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소리쳤다. 작가가 되려는 자신의 꿈을 모욕한 발언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우림이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나는 카톡방을 열어 가장 위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몇몇 모인 방에 제발 좀 이곳에서 꺼내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숫자만 줄어들고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