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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떡볶이

feat. 아무리 데워도 딱딱한 떡

by 우리마음

일요일 아침 11시 40분.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오늘따라 갑자기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맨 앞줄에 앉아있어서 목사님의 시야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책상 밑으로 핸드폰을 두들겨 교회 근처에 떡볶이 집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이런 저런 영혼이니 심령이니 하는 비세속적이고 고차원적인 말들이 난무한 대표기도에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응한 내 모습이 무색하게도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인 '식욕'에 지배된 순간이었다.


떡볶이 생각이 들고 난 후 이상하게 길게만 느껴졌던 설교(게다가 혼나는 기분까지 들었다)가 끝나고, 요즘 이직을 하고 싶다는(더 정확히는 현재 회사를 그만 다니고 싶다는) 욕구를 달래기 위해 꼭 들고다니는 노트북이 들어있는, 한마디로 의지는 있지만 행위는 없음을 상징하는 투미 배낭을 들쳐매고 가장 가까운 역인 온수역을 향해 걸었다.

4월 마지막주, 벚꽃은 진작에 졌지만 여전히 길에는 쨍한 색감의 철쭉과 이외 기타 등등의 앉은뱅이 꽃들이 봄의 임무를 넘겨받은 것마냥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도 제법 한여름 느낌을 낼듯 말듯 했다. 땀도 날락 말락 했다. 네이버 지도에 '떡볶이'를 검색했지만 예상한대로 일요일이라 문을 연 식당은 몇 없었다. '할머니 떡볶이'라는 맛집의 냄새를 풍기는 분식집이 목록에 있었지만 벌써 여름이 될락 말락 하는 대낮의 온도에 걷기엔 위치가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떡볶이를 아예 포기하기엔 이미 마음이 너무 꽂혀버렸다. 주변을 배회하던 나는 아쉬운대로 역 근처에 있는 씨유 편의점에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니 생각보다 시원하지도 않았고, 묘하게 가정집 냄새가 나는듯한 진짜 동네슈퍼 같은 느낌의 편의점이었다. 내부 의자와 테이블은 어수선하게 놓여져 있었고, 바닥에는 음식 부스러기들이 그대로 있었다. 까맣게 탄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 2명이 온갖 군것질 거리를 펼쳐놓고 죽치고 앉아서 자기네 딴에는 심각한 얘기(자기는 00랑 사귄 적 없다, 남자 아이돌 아무개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하는 류의 이야기들)를 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 외부인인 것 같다는 낯선 느낌에 그냥 나갈까 고민하다가 냉장고로 가서 플라스틱 컵에 담겨 있는 떡볶이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종류는 딱 2개뿐이어서 무얼 고를지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막상 뜯고 보니 면과 떡이 함께 담겨 있는 라볶이였다. 조리법에 '전자레인지 4분 30초'라고 되어 있었다. 플라스틱에 뜨거운 것을 담지 말라는 건강 상식이 생각나서 괜히 찝찝했다. 건강은 챙겨야지, 4분만 돌리자, 하고 인스턴트를 먹는다는 죄책감을 30초로 퉁쳤다.


'띵!'

만국 공통 전자레인지 완료음과 함께 떡볶이를 꺼내들었다. 전자레인지 안이 연기로 자욱해서 일부러 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채로 두고 미리 잡아둔 창가 벽에 붙어 있는 바 좌석으로 돌아왔다.

폭이 넓지 않았던 바 테이블 위에 스포츠토토 종이들이 종류별로 디피되어 있었다. '1인당 스포츠토토 10만원 이상 구매 불가'라는 안내 문구도 함께 붙어 있었다. 내 옆 자리에서는 한 아저씨가 신중한 표정으로 5장 정도 돼보이는 복권을 OMR카드처럼 펼쳐놓고 있었다. 이쯤되면 식사를 위한 자리가 아니고 복권 긁는 테이블인가 싶었지만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떡볶이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떡과 라면 사리를 휙휙 휘젓자 안쪽에 갇혀있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라면 사리가 소스를 적당히 머금은 것이 떡보다 손이 더 자주 갔다. 이 기성품 떡볶이는 내가 원했던 떡볶이와는 물론 차이가 있었다. 한입 먹을 때마다 인스턴트 소스 특유의 맛이 났다. 마냥 싫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아할 수도 없는, 전반적으로 '달달함'으로 승부하려는 공산품 특유의 맛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떡볶이를 호호 불어가며 다 먹었다. 마지막엔 콧등에 맺힌 땀을 닦아야했다. 마치아저씨들이 잘 먹은 국밥 한그릇의 끝에 땀을 닦듯이.




따지고보면 오늘 먹은 떡볶이는 질적으로 봤을 때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 먹고 난 후 마무리 기분이 꽤 만족스럽다는 점이 소식좌인 나로서는 신기할 노릇이다. (소식좌는 먹는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맛 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기분이 안좋다.)


어쩌면 나는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하고 싶은 것'을 함으로써 힘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들어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 언젠가부터 여행은 설레지 않았고, 주말에는 힐링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억지로 뭐라도 하려는 식으로 집을 나서지만, 정작 목적 없는 외출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아침부터 월요일 생각으로 우울해지기 일쑤였다.


하고 싶은 것은 없는데 하기 싫은 건 많아져만 갔다. 예를 들자면 출근하기는 비명이 나올정도로 싫지만 정작 퇴사를 한다고 하면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그야말로 'WISH'영역에서는 현재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다. '언제부터 내가 삶을 이렇게 수동적으로 살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부쩍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가끔 새벽 3,4시쯤 잠에서 깰 때면 무의식중에 잠재돼 있던 두려움에 순식간에 휩싸이곤 한다. 바쁜 일상을 보낼 때는 억눌려있던 감각들이 새벽에는 아주 예민하게 곤두서서는 문득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마치 형체가 있는 것처럼 체감하게 만든다. 마치 한번뿐인 내 인생이라는 작품을 소중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감상하고 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빨리감기 해버리는 기분이다. 빨리감기 끝에 금방이라도 허망하게 'the end'라고 떠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하고 싶은 것이 찾아온 하루를 보낸 오늘의 나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힘은 크다. 비록 그게 전자레인지에 아무리 돌려도 딱딱한 반투명한 공산품 밀떡 떡복이를 먹은 것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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