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어쩔 수가 없다' 생각

어쩔 수가 없는 한국영화의 명리학적 색채

by Emily in Seoul


사회적 구조다, 어쩔수가 없다



영화《어쩔 수가 없다》엔 반전이 없다.

주인공은 살인을 계획적으로 저지르고, 하나하나 성실하게 정당화한다.

개인의 내러티브나 감정적 놀음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장면의 임팩트일까?

연기 차력쇼라고 불릴 만큼 정점의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에 의존한 몰입감의 나열만으로 보기엔 아쉽다.


박찬욱 x 류성희 감독의 세팅과 미감은 당연히 어워드감이지만

과한 미장셴으로 느껴졌던 이전 작에 비하면 대중성 있는 방향으로 틀었다.


물론 이런 표정이 가능한 배우는 그가 유일할 것이다.


제목이 다했다.

언어로 부터 시작되었고, 막을 내렸던 영화다.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이치적인 흐름을 품어냈다.

아주 보편적인 구조(사회적 시스템)을 상징적 언어로 승화해 제목에 붙여 버렸다.

그래서, 이전 작에 비해 대중적이며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시스템을 품는 방식 면에서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박찬욱식 해석법이 돋보였기에, 수작이라 여겨질 만하다.



사주도 이치적이며 보편적이다.


특히 이번 영화처럼 구조성이 있다면

상징적 해석에 한해서는 사주가 적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전달될 동양 철학적 해석이 부드럽게 가능하다는 건 전혀 신기할 여지도 없다.

당연하고, 이치적이기 때문이다.



탐재괴인(貪財壞印), 재성에 굴복하는 인성


이 영화는 재성(金)이 지배한다.

모든 행위는 현실적 논리가 있고, 그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아마추어 살인마인 김만수, 그는 미숙하다.

저지르며, 괴로워하고, 구차한 도피에 급급하다.


다만, 그에겐 죄책감은 없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온 날도 여느 평범한 날들과 다르지 않다.

하루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가장의 불편한 투정이자 아내에 대한 소유욕의 찌질한 발현이였을 뿐이다.


그가 내뱉는 말은 죄책감이 아니라 당연함이다.
“어쩔 수 없잖아.”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거대한 악은 종종 잔혹한 괴물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보통의 인간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광인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 속 "재성"의 이치에 맞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만수 캐릭터는 재성(金)이 인성(木)을 무너뜨리는 전형적인 탐재괴인(貪財壞印)의 형상이다.

감정이나 윤리는 자리를 잃고, 계산과 판단만 남았다.


분재를 하고, 톱을 들고, 삽을 쓰는 그의 모습은 순수성에 비정함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탐재괴인의 상징적 행위라 볼 수 있다.



재성에 맞서는 가족들


아내 미리는 춤을 춘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숨구멍을 만들어 주기 위한 몸짓에 가깝다.

불씨처럼 작고 조용한 식상(火)의 움직임이다.

재성에 대한 과한 지향이 결국 식상으로 분출된 것이다.


과한 식상으로 가끔 불륜으로 의심될 만한 장면도 스친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파헤쳐 지지도 않는다.

재성이 지배한 구조에선 비도덕성은 충분히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륜까지도 감행할 그녀의 의지에 도적적 판단은 남아있지 않다.


딸의 천재성은 비켜난 감수성, 편인(偏印)이다.
그녀는 자기 세계를 만든다. 그렇기에, 들리지 않은 음악을 한다.

이는 커다란 재성(金)의 소음 속에 묻혀버렸음을 뜻한다.

그 모두가 들려준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아무도 듣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닐까?


아들의 반항은 조금 다르다. 불씨도 아니고, 감수성도 아니다.

비견과 겁재의 기운. 몸으로 부딪히는 힘이다.

그의 저항은 재성의 논리에 따라 어떠한 죄책감이나 인간성에 대한 복귀도 남기지 않는다.


그가 왜 그런 행위를 벌였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도 없다.

금(金)의 세계에서는 ‘문제아’라는 낙인만 찍힌다. 그저 분류되고, 정리된다.


춤은 미미하고, 음악은 들리지 않고, 반항은 금세 정리된다.
그 모든 시도는 거대한 벽 앞에 놓인 얇은 종잇장 같다.
그저 잔잔하게 밀리고, 조용히 적응해 간다.



'목'에 대한 갈망


"목"에 둘러쌓인 그러나 슬픈 표정의 만수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목(木)’이 있다.
나무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순수함의 상징이다.

구범모(이성민)와 이아라(염혜란) 부부는 숲속에서 살아간다.

나무 데크 위로 안개가 내려앉고, 바람이 잎사귀를 스친다. 그곳엔 도시의 계산법이 없다.

대신 그들의 삶은 순수한 목(木)에 기대어 있다.


숲 속의 전원주택에서 아날로그 타자기, 음향 장비들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그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구구절절한 대사없이도 보여준다.


최선출(박희순)은 그는 겉으로 보면 완벽하게 재성적인 사람이다.
비정한 논리, 화려한 언변, 능숙한 설득.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갈망이 있다.

산장에 나무를 쌓아두고 바베큐를 굽는, 단순하고 목(木)적인 삶에 대한 갈망.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도 산장에서 살자.”

아내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고, 그 제안은 곧 이별이 되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제지 산업은 "위선적 순수성"을 대변한다.

겉으로는 자연과 연결돼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연을 가장 멀리 밀어낸 곳.
숲을 닮은 얼굴을 하고 숲을 없앤다. 모두가 지향하는 순수성에 대한 냉정한 구조적 시선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없다. 현상의 해석일 뿐


이 영화에 대한 혹평도 난무한다.


"할인권으로 1000원 주고 봤는데도 돈이 아까웠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영화였다"

"배우들을 이렇게만 활용하다니 아쉽다"


박찬욱 감독의 회의적 시선이 그런 평가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뛰어넘어

어떤 ‘삶의 질감’을 보여주는데 그 의의가 있고,

특정 판단을 유도하는 것 조차 그에겐 조심스럽다.


‘영화가 삶 그 자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딱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현상을 바꿀 순 없다.

구조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게 그에겐 전부다.

어쩔수가 없다는 스토리와 연기로 점철된 할리우드를 넘은 세기적이며 시대적인 시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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