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사슴 Jun 16. 2024

먼지의 소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때로는 큰 위로가 된다.


하루종일 불려다닌다. 여기저기 뛰어 다닌다. 정신 차릴 새 없이 우왕좌왕. 출근과 퇴근에 관계없이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일이 줄지어 있다. 오롯이 쉴 수 있는 단 하루의 시간도 당분간 기약 없다. 


매일 무너지지 않으려 버틴다. 그러다 보면 가장 소중한 것을 깜빡하는 일도 생긴다. 절대 잊지 못할 일을 잊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는 것도 잠시, 사지를 지탱하고 있던 힘이 풀리고 결국 주저앉고야 만다. 그럴 때마다 오로라가 보고 싶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작아지고 싶은 것이다. 내가 나로 인해서 하찮아지고 싶다. 


커다란 지구에 빌붙어사는 사람 한 마리. 대지에 얕은 발자국 몇 개를 남기고 흩어져버리는 몸뚱이. 머리 깊숙이 알고 있으면서 때로 까맣게 앚고야마는 그 진리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항상 진실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쉽게 묻혀버리니까. 하여간, 명징한 우주의 진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내 머리 위와 저 너머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오로라를 마주하고 싶다. 우주와 지구, 자연의 위대함과 내 삶이 한낱 티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 주변 먼지들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회복하고 싶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으려면 일단 퇴사해야 한다. 휴가로 안 되겠느냐고? 안 된다. 내 휴가는 고작 3일, 주말 껴서 5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한낱 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떠나지만 여행은 여행이기에, 오로라를 보러간 김에 주변이라도 좀 둘러봐야 하는 인간적인 욕심을 도저히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목돈이 필요하다. 그래, 퇴직금. 내겐 이자가 들어오는 적금이라곤 카카오톡 저금통 밖에 없으므로. 스위스나 캐나다로 떠나기 위해 드는 비행값을 포함한 유류비를 감당해줄 돈줄은, 한 마디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퇴직금뿐이다. 그리고 가장 안정적인 결말이다. 퇴직금으로 지금까지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이 다가온 깨달음을 동반자 삼아 인생2막을 시작한다는 것.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잖아. 스토리 구조가 좀 심심하긴 해도 안정적이잖아.


갑자기 사장님이 모종의 이유로 올해만 휴가를 2주 주겠다고 발표했다 치자. 그리고 돈은... 로또에 걸렸다고 치자, 딱 오로라를 보고 올 만큼의 액수로. 이쯤되면 우주만물이 나를 오로라 앞에 데려다 놓기로 결심한 것 같다. 나는 꽤 설레고 이 모든 과정이 어떤 계시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퇴사하지 않는다면, 어렵게 구해온 내 깨달음이 파괴되는 데에 단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복귀한 월요일 오후 세 시도 넘기기 힘들 것 같다. 퇴사를 해야 이 소중한 깨달음의 휘발을 유예할 수 있다는 이상한 확신. 부사장님, 부장님, 클라이언트... 아, 분명 그럴 것이다. 우주고 미물이고, 먼지 나게 한판 싸우고 시원하게 떠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미 떠났다 온 뒤라 다시 떠날 수도 없다. 이야말로 부조리극 엔딩의 실사판.



유튜브로 물결치는 오로라를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시대지만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내 손 안의 오로라, 내 두 손가락으로 크기가 커졌다 작아지는 오로라, 본연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고 어여쁜 오로라, 좀 많이 아름다우면서 어딘가 금붕어 꼬리를 닮은 그것. 


어쩌면 내 상상으로 재현되는 오로라가 실물과 가장 닮았을 거라 짐작한다. 눈을 감는다. 어두운 하늘 아래, 저멀리까지 맑은 하늘이 펼쳐져있다.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둡지만, 하늘에 구름 한점 없다는 사실이 왠지 피부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움직임인지 존재 그 자체인지 모를 빛들이 넘실거릴 거다. 내가 가보지 못한 높이에서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여기 이 시각에, 존재를 내보이는 일만이 자신의 관심사인 것처럼 무심하게 넘실거리고. 거대한 빛의 파도 아래에서 무력하게 열린 내 눈과 얼굴 위로 그 색이 묻을 것이다. 내 눈을 거쳐 뇌로 박히는 색색의 향연은 그 어떤 RGB도 거치지 않은 채 지정할 수 없는 색상값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모든 감각을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추위까지...



아, 깜빡 잠들 뻔했다. 내일은 야근하지 말아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안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