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푸에르카(altapuerca)에서 아침을 준비했다. 꽤나 흐린 하늘이었는데, 오늘따라 아침 공기가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다른 순례자들이 벌써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지고 온 얇은 옷들을 겹겹이 껴입고 겉옷 위에 우비까지 꼼꼼히 쓰고 나간다. 얼마나 추운가 싶어 잠시 알베르게 앞에 나갔다 왔다. 세상에, 입김이 나온다. 반팔 차림으로 잠들었었는데 이 옷으로는 도저히 출발을 못 할 것 같아 나도 가지고 온 옷들을 모두 꺼내 입었다. 반팔 티 하나, 얇은 셔츠 두 개, 기모가 들어간 바람막이에 목도리 대용으로 쓸 스포츠 타올까지. 그런데도 체감 상 거의 영하에 가까운 오늘의 날씨는 며칠 전 폭염이 있던 곳과 같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장갑을 껴도 서늘한 냉기가 계속 들어와 바람막이로 손을 감싸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걷다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우유와 빵, 그리고 또띠야를 주문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더위에 아메리카노와 얼음을 주문했겠지만 오늘은 너무 추워 차가운 음료를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따뜻한 우유로 몸을 녹이고 촉촉한 빵으로 아침을 먹으며 속을 달랬다. 이곳에서 다시 만난 뻬뻬와 라이언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어 카메라를 들었다. 할아버지들은 스페인어, 나는 한국어로 서로 알 수 없는 대화를 했지만 표정과 손짓, 몸짓으로 1~20분가량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침을 걷다 보니 어제 한국인들과 가볍게 술 한 잔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근데 승은씨는 까미노엔 왜 왔어요?”
외국인들에게 흔히 들었던 질문인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왔다고 대충 둘러댔었다. 한국어로 이 질문을 다시 듣더라도 똑같은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이 질문을 듣고 한참동안 답을 하지 못 했다.
예전에 삼성그룹 중 한 곳에서 최종면접을 봤던 적이 있다. 운 좋게 서류와 인적성검사를 통과했다. 적당히 꾸며진 지원동기와 살아온 경험, 포부 등을 예쁘게 갈아 넣은 자기소개서 한 장은 내게 삼성맨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일대다로 진행된 최종면접에서 면접관이 내게 했던 질문은 '지원동기 한 번 말해 봐요'였다.
나는 당연히 준비된 지원동기를 말했고, 외우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말하려 노력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질문은 '' 였다. 흔히 말하는 압박면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지원동기를 살짝 돌려 솔직함이 묻어나게끔 적당히 꾸며서 또박또박 말했다. 또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승은씨, 당연히 승은씨가 우리 회사 좋아하고 잘 맞는 것 같아서 지원했겠죠. 근데 그런 거 누가 몰라요, 그런 거 말고 진짜 왜 오고 싶어 했는지 말 해봐요."
마음속으로는 '돈 많이 주고 네임밸류 좋은 직장이라서요.'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실제로 면접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한참을 고민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소개서에 적힌 내 모습을 잘 반영할지 고민하면서도 삼성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야 했으며, 지금 눈앞에 있는 면접관을 만족시킬 만한 똑똑한 답변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러게 나 여기 왜 왔지' 라는 생각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렇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남들 다 좋아하는 대기업이라서 온 거였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는 뭘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으로 나를 가꿨고 모두가 좋아할 만한, 하지만 결코 평범하진 않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후에 한참을 나에 대해 고민해왔었고, 그 경험은 내가 가장 강하게 반응했던 분야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나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진짜 나는 까미노에 왜 온 걸까.
그저 10년 전에 책에서 우연히 봐서?
스페인이 좋아서?
낯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나를 생각 할 시간이 필요해서?
나에 대해 알고 싶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싶어서?
온전한 나로 있고 싶어서?
나를 피하지 말고 마주하고 싶어서?
행복하단걸, 살아있단 걸 느끼고 싶어서?
그동안 나를 누르고 있던 것들을 돌이켜 보고 싶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어쩌면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까미노인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를 둘러싼 질문들을 안고 왔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까미노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찾아내야 한다는 과업만이 내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팜플로냐, 로그로뇨에 이어 세 번째 대도시인 부르고스(Brugos)에 도착했다. 도시에서의 관광을 즐기기 위해 온 순례길은 아니었으나 가끔 나오는 이런 대도시가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늘은 조금씩 비도 내린 데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과 같이 출발해서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사진을 찍을 틈이 없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는데 너무 신나게 걸었던 탓인지 결국 무릎에 조금 무리가 간 것 같다.
부르고스까지 같이 걸어온 한국인들과 함께 wok이라는 뷔페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다양한 음식을 먹을 생각에 약간 들떴다. 하지만 한 접시, 두 접시 비우면서 생각보다 느끼하고 맛이 없어 조금 아쉬웠다. 세 번째 접시를 가지고 오는데, 첫째 날 피레네에서 인사를 했던 연응씨와 8일째 되던 날 로스아르코스에서 인사를 했던 석재오빠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석재오빠는 로스아르코스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뒤 산길에서 내게 무릎보호대를 빌려주려고 했었다. 그다음에는 비아나에서 같은 알베르게를 쓰며 저녁을 함께 먹기도 했다. 그 후 걸음 속도가 차이 나서 앞으로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후 정확히 5일 만에 다시 만났다. 알고 보니 석재오빠는 부상으로 부르고스에서 이틀째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고, 그 사이에 내가 따라잡은 것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내일 출발부터는 다시 속도 차이가 나 한참을, 어쩌면 계속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깨끗한 느낌이 드는 도시인 부르고스(Burgos).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오늘 부르고스에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데카트론에 가서 무릎보호대 한 쪽 더 사고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미사를 듣는 것. 먼저 데카트론에 가기 위해 호스피탈레로에게 물어보았다. 부르고스 지도를 앞에 놓고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어가 섞인 영어를 듣고 나니 데카트론이 점점 더 멀어졌다. 일단은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버스정류장에 가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데카트론은 어떻게 가느냐고 시민들에게 물어보았다. 워낙 큰 정류장이라 그런지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어떻게 가는지 확실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도 없어서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으로는 도통 나오지 않아서 시민들에게 물어보는 방법뿐이었는데, 하얀 버스, 노란버스, 빨간 버스 등 알려주는 게 다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같은 방향으로 가는 스페인 사람을 우연히 발견했고, 같은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하얀색 버스는 무료 버스로 데카트론이 있는 부르고스 근교까지 연결된다고 한다.
데카트론에서 무릎보호대와 간식으로 먹을 초코바를 샀다.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빵집과 아이스크림가게를 들려 간식거리를 샀다.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하나씩 꺼내 먹었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대도시에서 파는 간식은 전부 맛있을 줄 알았다. 간식을 다 먹고 미사를 가기위해 다시 나왔다. 미니 기차가 지나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결혼식이 한창 진행 중인 성당에 도착했다. 운 좋게 성당 옆에서 하는 결혼식의 피로연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내려오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곱게 땋은 머리에 꽃 장식을 한 신부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공중에 흩날리는 피로연 꽃잎을 하나 주웠다. 좋은 향이 났다.
성당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에 담진 못 했지만, 생각보다 외부인에게 공개된 구역이 적어서 아쉬웠다. 대도시의 상징 중 하나인 대성당이라 그런지 순례자와 시민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미사에 참석해 서 있을 자리조차 없었다. 나는 성당을 빠져나와 도시를 구경하러 갔다. 성당 옆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고 넓은 걸 보니 광장인 것 같다.
광장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한국의 아이들이 한복 입고 부채춤을 추는 걸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전통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소중히 간직한 과거의 모습을 현재에 내보이는 것 같았다. 하루만 더 있을까 고민이 들 정도로 너무 예쁜 부르고스였다.
저녁을 먹으러 트립어드바이저에 나온 맛집에 왔다. 꽤나 오래전부터 있던 맛집이라는데 뭐가 맛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술을 한 잔 주문하고 계산대가 있는 1층을 구경했다. 가만 보니 부엌에서 특정 음식이 제일 많이 나가는 것 같아서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알베르게를 같이 쓰게 된 한국인 동행들과 자리를 잡고 앉아 직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 메뉴를 달라고 했다. 역시나 맛은 그저 그랬다.
부르고스는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의 전체 거리 중 1/3정도 되는 지점에 있다. 매일 2~30km의 길을 걸으면서 항상 1/3, 1/2, 2/3 지점에서 드는 생각이 있다. 1/3지점에서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오늘은 할 만 한데? 그래도 다리가 좀 아프긴 하네.', 1/2지점에서는 '아직 반이네. 지금까지 온 만큼만 더 가자.' 2/3지점에서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너무 힘들고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 순간을 조금 더 즐겨보자'.
산티아고까지의 1/3인 지금이 딱 그렇다. 생각보다 빨리 왔고 꽤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로가 누적되면서 다양한 감정이 쌓인 순간순간들이 조금은 버겁기도 했다. 내일부턴 지금껏 쌓아온 것들을 조금씩 비우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부르고스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