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차. 마지막 대도시인 레온에서의 휴식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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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지도, 춥지도 않은 아침에 저 멀리 해가 떠오르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소중히 내딛다 보면 어느새 마을이 보이기 마련이다. 작은 마을에 도착해 알베르게를 겸하는 카페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석재오빠와 연응씨를 다시 만나고 아침을 먹었다. 걸으면서 먹을 간식과 마실 물을 사고 다시 마을을 떠났다. 오늘은 나만의 힐링데이를 즐기기 위해 레온이라는 대도시로 목적지를 정했다. 어김없이 보이는 화살표는 작은 화살표의 꼬리를 물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킨다. 오늘도 길을 걷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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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랜만에 웹툰을 봤다. 한국에서는 거의 매일 해왔던 SNS도, 메신저도, 웹툰도 순례길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순례길 초반에는 하루하루 버텨내기에 바빴다. 요즘 들어서는 내게 주어진 이 짧은 순간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1분 1초를 소중히 보내고 있었기에 한국에 두고 온 것들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평소 웹툰을 좋아하던 나는 다양한 사이트들을 섭렵하며 수십 개의 웹툰을 봐왔는데, 그중에서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믿고 보는 작가가 있다. 어제 본 건 미티작가의 '한 번 더 해요'라는 웹툰으로, KBS에서 방영한 장나라, 손호준 주연의 '고백부부'라는 드라마의 원작으로 유명하다. 만 18세 이상이라서 오히려 아쉬운 웹툰인데, 초반에는 선정적인 장면이 나왔을지언정 중후반을 지나면서 미티 작가 특유의 심리묘사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 선영이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었다. 웹툰 중 선영이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는 물건을 쉽게 구매하지만, 정작 자신은 오래되고 낡은 옷을 입고 있다. 평소 갖고 싶었던 예쁜 속옷의 가격표에 충격을 받고 세일 코너로 넘어가 저렴한 상품을 구경하는 동안 남자친구와 다퉈 쇼핑을 하러 온 여자 손님을 보게 된다. 예쁜 속옷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는 선영이의 눈에 들어온 미혼의 여자 손님은 자신을 위한 투자라며 선영이가 사고 싶었던 예쁜 속옷을 큰 고민 없이 포장해갔다. 그 순간 선영이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독백을 하게 된다. 갖고 싶은 물건을 쉽게 살 수 없고 가족을 위해 한 푼이라도 더 아끼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선영이는 자신이 미혼이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그녀는 결혼으로 인해 바뀐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 하게 되고, 혼자가 되어 자신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회상을 마무리한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낯설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하는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지낼 때, 잦은 실수로 여러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는 신입사원 때, 자신의 틀에 맞출 뿐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의 연애 중일 때, 가족의 기대를 온몸에 받지만 정작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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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ddff.jpg (네이버 웹툰 '한 번 더 해요' 69화 중)


"내 인생에 나를 찾고 싶을 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고, 그저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을 때"

(출처 :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75393&no=69&weekday=fri)



나는 나를 살고 있지 않았기에, 나를 찾고 싶어서 혼자가 되기 위한 여행을 하러 온 걸까. 많은 걸 내려놓고 떠나온 지금 이 순간 역시 나를 찾는 과정인 걸까. 길을 걸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좀 더 외롭게, 좀 더 혼자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지고, 또 나로 인해 가다듬어지는 나의 다양한 모습들.

나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었던가.


내가 가져온 질문들은 답이 있긴 한 걸까.

이 길의 끝에 도착하면 무언가 바뀌긴 하는 걸까.

질문조차 뚜렷하지 않은데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저 달리기에 급급해, 더위를 피하는 것만 생각하다 중요한 걸 놓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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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지나 또 다른 화살표를 따라갔다. 어김없이 이어진 화살표 앞에서 잠시 멈춰있었는데 어느새 레온의 상징이 발밑에 나타나 있었다.


레온(Leon)에 도착했다. 프랜차이즈 매장인 KFC와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다세대주택을 보니 대도시에 온 것 같아 느낌이 색달랐다. 어제 예약해 둔 호스텔을 찾아 도시 중심가로 들어왔다. 오늘은 힐링데이였기 때문에 싱글룸에서 푹 쉴 예정이다.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마침 근처에 레온 대성당이 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대도시인 이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사에 참석한 건 아니었지만 6유로를 내고 성당에 들어갔다. 수많은 예술이 녹아있는 성당 장식들과 높게 자리한 천장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높게 펼쳐진 완벽하고 아름다운 창문 아래 나는 한낱 작은 인간일 뿐이었다.


성당의 정 중앙에 서서 빛이 들어오는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꽃 모양으로 수놓아진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들어온 빛이 순간 나를 강하게 내리쬐었다. 그 어떤 종교적 이유나 철학적 이유와 무관하게 성당의 정 중앙에서 빛을 응시하고 있는 내가 객관화되었고, 이내 다양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하염없이 긴 거리를 절뚝이는 다리로 걸어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아마 앞으로도 찾지 못할 나를 위한 감정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이 겹쳐지며 수없이 많은 감정이 솟아오르나 했더니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곳에 서 있다는 생각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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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이 되어서 같은 호스텔에 머무르는 석재오빠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왔다. 가우디가 남긴 작품을 구경하고, 근처에 적당히 들어간 가게에서 샐러드와 하몽을 주문했다. 또띠아와 레몬크림을 후식으로 먹고 밖에 나왔는데 점점 비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가게 입구에 감자칩을 쌓아놓고 파는 가게도 있었고, 다양한 오르골과 오래된 인형을 전시해놓은 곳도 있었다. 이국적인 모습들에 신기하긴 했지만 레온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걸음을 재촉했다. 스페인 초콜릿 대표 브랜드 중 하나인 VALOR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세트메뉴를 주문했고,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츄러스에 달달한 초콜렛을 푹 찍어먹으니 레온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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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예쁜 스페인.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졌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졌다. 다행히 오늘은 통금이 없는 호스텔에 예약해 둔 터라 밤거리를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어느덧 깜깜해진 광장과 낮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레온 대성당 앞을 지났다. 로그로뇨를 생각하며 타파스를 찾았지만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레온에서 유명한 건축물은 성당과 가우디 작품뿐이었다. 하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과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골목길들이 조금 설렜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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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싱글룸이라는 걸 쓰고 있다! 무려 34유로의 돈을 내고 혼자 쓰는 화장실과 샤워실, 그리고 더블베드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 오늘 하루 동안 거의 65유로가량의 돈을 썼다. 레온이 마음에 들었다면 하루 더 쉬려고 했지만 걷는 것에 비해 머무를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레온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은 400km를 돌파한 기념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명상의 시간이라도 가져야 하나 싶었는데, 잔뜩 먹은 술과 타파스들이 나를 싱글룸의 포근한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고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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