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차. 순례길이라고 항상 심각하진 않다.

by 양송이타파스
01.JPG


02.jpg


오늘은 간만에 늦잠을 자고 호스텔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나왔다. 레온에서 하루 더 있을까 고민도 했지만 조금이라도 걸어 보기로 했다. 어제 오랜만에 밤 10시가 넘도록 밖을 거닐고 있었기 때문일까. 10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유럽의 한여름에, 깜깜한 밤이 되었을 무렵까지 신나게 놀다 기분 좋게 잠들었기 때문일까. 아침에 일어나 석재오빠한테 카톡을 해보니 이 오빠도 나랑 비슷한 심정으로 잠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레온에서 하루 더 보내기에는 시간이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걸어가 보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20km 뒤인 비야당고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평소보다 4~5시간이나 늦게 체크아웃을 했고, 근처 카페에서 아침 겸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다. 박물관과 광장을 지나 레온을 벗어날 때쯤에 어디서 익숙한 그림이 보인다 했는데, 한국에서 보던 치킨이었다.


스페인에서 먹는 음식들은 한국음식의 재료나 맛과 비슷한 것이 많아 한국음식이 그립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먹는 치킨 특유의 고소함과 짭짤함, 그리고 바삭함은 세계 최고다 라는 생각이 들 무렵, 거짓말처럼 눈앞에 치킨을 파는 곳이 나타났다. 오븐에 치킨을 넣고 바베큐식으로 구워 기름기를 뺀 게 꼭 굽네치킨 같았다. 아침을 먹은 지 30분도 채 안 되었지만 치킨을 차마 지날 수가 없었던 우리는 치킨 4조각과 콜라를 주문했다.


04.jpg




라 비르헨 델 까미노(La virgen del camino)에 왔다. 레온에서 7km 떨어져있는 마을이다. 레온에서 20km 떨어져있는 비야당고에 가기위해 잠시 들른 이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여기서 쉴까하는 생각이 나를 알베르게로 이끌었다. 사실 처음부터 7km만 걸을 생각은 없었다. 비야당고까지 어떻게든 가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어젯밤 레온에서의 휴식과 늦잠, 그리고 치킨으로 마음이 붕 뜬 게 분명했다.


근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각종 와인과 음료수, 고기류, 하몽, 치즈, 코카콜라를 구경했다.자세히 보니 코카콜라 캔에 단어가 몇 개 적혀있었다. 그 중 하나는 ‘Tenerife’ 였다. 에드 시런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좋아했던 곡 중 하나인 ‘Tenerife Sea’는 에드 시런이 스페인의 아름다운 Tenerife Sea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 것도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했다.


Ed sheeran - Tenerife sea

You look so wonderful in your dress

I love your hair like that

The way it falls on the side of your neck

Down your shoulder and back

...


And should this be the last thing I see

I want you to know it's enough for me

Cause all that you are is

all that I'll ever need

I'm so in love

...


You look so beautiful in this light

Your silhouette over me

The way it brings out the blue in your eyes

Is the Tenerife Sea


지금은 윤식당2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당시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인데, 이렇게 코카콜라에 붙여진 이름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05.jpg




아직은 갈리시아 지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내가 찾는 우유가 없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만 생산, 판매되는 페이락코 브랜드 우유가 있는데 포장지에 'U'라고 적혀 있다. 갈리시아 지방의 소규모 낙농업자들이 유전자 변형이 없는 최상 품질의 농산물을 키워 소의 사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방목하는 농장의 땅이나 풀 상태까지 매일 신경 쓰고, 소들이 마시는 물과 농장에 뿌리는 물의 청결도 매일 따로 관리한다. 게다가 착유과정도 사람이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젖소가 원하는 시간에 자진해서 착유기에 들어가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게 되는데, 평소에 7080디스코를 틀어줘서 젖소들이 신난다나 뭐라나.


100%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갈리시아 지방의 소규모 낙농업자들이 대기업을 상대로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던 사례라 흥미가 갔다. 페이락코 브랜드 중에서도 'U' 마크가 있는 우니클라는 최상급으로 다른 우유에 비해 가격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사족) 그 후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마트에서 우유찾기였다. 이곳에서는 우니클라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가당/무가당 등 다양하게 나눠져 있어서 선택하기가 좋았다. 우유가 다 똑같지 하며 별 기대 없던 석재오빠도 한 번 마셔보더니 그 뒤로는 같이 우니클라만 찾아다녔다. 다른 우유에 비해 비싼 우니클라의 가격은 1리터에 0.98유로였다.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장본 걸 냉장고에 넣어놓고 밖으로 나와 혼자 마을 구경을 하던 중, 이탈리아 아저씨와 아주머니 총 3분이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아저씨 한 분만 영어를 조금 할 줄 아셔서 간단히 인사를 나눴었는데 괜찮다면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고 제안해주셨다. 알베르게에서 낮잠 자고 있을 석재오빠가 생각나 '친구 한 명이 더 있어서 우리끼리 먹어야 할 것 같다, 마음만 받겠다.'고 전한 뒤 마트로 갔다. 마트에서 또 마주쳤을 때도 반갑게 인사만 하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기에 내 의사가 잘 전달되었나 보다 했는데, 알베르게 식당에 우리 몫의 음식을 더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까 이야기했던 이탈리아 아저씨나 나나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터라 중간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나 보다. 우리 나름대로 저녁을 해 먹기 위해 장을 봐 왔지만 이분들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일단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채식주의자여서 고기없이 호박과 치즈를 버무린 소스, 펜네, 샐러드, 와인, 하몽, 바게트 등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이탈리아 가정식을 배불리 먹고 우리가 장봐온 음식들로 저녁을 두 번 먹게 되었다.


07.jpg 이탈리아 가정식
06.jpg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이탈리아 아저씨


순례길에서 나는 매일 일기를 써왔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을 최대한 자세하게 써서 많은 걸 기억해두고 싶었다. 나의 순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사진과 동영상, 일기들로 하루하루를 걸어 나갔다. 가장 길었던 일기는 A4 3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어제와 오늘은 힐링데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걸 축소시켰다. 20여 일 만에 가져 본 느긋한 마음과 편한 기분이 좋았는지, 나를 꽉 조이고 있던 것들이 조금은 풀어진 느낌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일기도 8줄 정도만 적었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글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일기 원문 공개) 오늘은 정말 걷는 게 너무 귀찮은, 뭔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