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차. 어린 아이들이 유모차에서 내려왔다.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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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의 아침


오늘은 아침에 알베르게를 나와 보니 웬일로 석재오빠가 입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서로 갈 길이 바빠 카페나 알베르게 외에는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웬일로 기다려주나 싶었다. 걸으면서 생각해 보니 어제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전해 준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한적한 공기에 새소리가 묻어나는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Missing person, 2년 반 전에 순례길에서 있었던 중국계 미국인 사망 사건이 있었다. 혼자 걷던 여자 순례자가 실종이 되어 스페인 뉴스에 보도되었고, 한참 뒤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 범인을 찾지 못 했다고 한다. 내가 겁 없이 혼자 순례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라고 하니 다른 한국인 분께서 조심하라고 말씀해주신 이야기였다.


마침 그 사건이 있었던 장소가 내가 오늘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고 괜히 신경이 쓰였는지 석재오빠가 나를 기다려주었다. 원래대로라면 혼자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을 텐데 오늘은 내 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주었다. 시야에서 조금 벗어날 정도로 걸음에 차이가 있다 싶으면 뒤돌아서 확인하거나 사진을 찍는 등 부담스럽지 않게 배려해줬던 것 같다.


(사족) 산티아고가 가까워져서야 알게 된 건데 이 오빠 성격이 원래 이런 것 같다. 상대방을 배려해주면서도 배려를 받는 쪽이 부담스럽지 않게 해주는 그런 성격. 생색을 내거나 감사를 받기 위한 행동이 아닌, 순수하고 정직한 배려. 상대방을 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지만 실제로 행하기엔 아주 어려운 단계의 배려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잠깐이지만 멋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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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에 출발해서 그런지 길 위에는 곳곳에 안개가 자욱했다. 뿌연 안개가 보이는 곳을 지나가야 했는데 들판에 내려앉은 차가운 공기 위로 따스한 햇빛이 잔잔히 퍼지는 게 느껴졌다. 안개가 쌓인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다 보니 뜬금없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예쁜 그림이 있는 어제의 알베르게에서 자고 일어나 길을 걷고 있는데 같이 걷던 동행이 이 알베르게에 대해서 기억을 전혀 못 하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아봤다.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가 실은 3년 전에 어떤 사고로 없어졌던 곳이며, 내가 봤던 그림과 사진들은 3년 전의 사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흔적을 찾아가지만 이상함을 계속 느끼면서 동행인과 길을 걷는데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게 된다.


가장 처음 떠올랐던 건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까 찾았던 자료와 비교해보니 3년 전 오늘 이 알베르게에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과 일치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사람들의 얼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때쯤, 어제저녁에 무슨 음식을 먹었고, 몇 명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알베르게에서 자기는 했는지, 그런 마을이 존재하긴 했었는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갔다. 하지만 사라진 마을이 많은 순례길인만큼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계속해서 걷고 있는데 안개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알고 보니 사실 그 길은 망자의 길이었고, 나와 내 동행 둘 다 망자였던 것이다. 3년 전 그 알베르게에서 있었던 사고로 사망했었기 때문에 망자의 길을 걸으며 서서히 기억을 잃어갔던 거라는 상상 속 이야기.


이렇게 혼자 시나리오를 펼치면서 왜 이런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요즘 들어 하루하루가 비현실적인 꿈처럼 행복한 나날들이었기 때문에 매 순간이 현실감 없게 다가와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었을까. 일기를 쓰고 내일 어디까지 갈지를 정하는 순간조차도 너무 행복했기에 마치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20일도 채 남지 않은 유럽에서의 까미노는 앞으로 평생 내 기억 속에 꿈처럼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겠지. 그땐 너무 좋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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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말, 새, 개와 함께 걷는 길 / (오) 근처에서 발견한 개발자국

사슴이 나오니 주의하세요!의 메시지가 담긴 표지판을 지나고 구멍이 숭숭 뚫린 토끼굴도 지났다. 순례자를 조심해달라는 표지판이나 사람과 개, 그리고 새와 말의 발자국이 그려진 표지판은 순례길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진짜 근처에 개발자국이 있었다. 레온을 벗어나면서부터 표지판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국도 중간에 있는 주유소에서 아침을 겸할 맛없는 간식을 먹고 높은 다리를 건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게 시련으로 다가온 극악무도한 다리 위에서 스틱을 꼭 잡고 정중앙으로만 걸었다. 그래도 이렇게 걷다 보니 아스토르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깐 지나는 마을이긴 했지만 은행이 있을 정도로 나름 큰 도시 중의 하나여서 조금 설렜다. 하얀 벽돌에 남색 문양이 인상깊은 건물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알고 보니 가우디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카페 이름이 가우디였다. 다행히 여긴 아침에 먹은 간식보다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카페에서 밥을 다 먹고 졸고 있는 석재오빠를 주섬주섬 챙겨 미사 중인 성당에 조용히 들어갔다. 화려하게 생긴 성당 안에 멋진 조형물이 있었지만, 성당의 아름다움은 천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싶다. 성당마다 독특한 문양이 있는 천장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성당을 나와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굴뚝 있는 집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슬슬 다음 마을이 보인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계속해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한 순례자 가족이 있었다. 부부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예쁜 두 딸이 타고 있는 유모차 두 개를 각각 하나씩 끌고 있었다. 옆에는 까맣고 큰 개가 그들을 호위하듯이 의기양양하게 걷고 있었고,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한 번은 오르막 경사가 있는 숲길에서 그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순례길에서 커다란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엄마와 아빠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 챘는지 아이들이 유모차에서 내려 와 유모차를 같이 끌고 올라갔다. 덥다고 투정을 부리거나 힘들다고 주저앉아 울기는커녕 산길을 묵묵히 올라가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힘든 길에서 나도 모르게 지금껏 쌓아왔던 심술과 분노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경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유모차를 올리는 걸 도와 드리려고 다가갔지만 자신들의 몫이라며 한사코 거절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생각해보면 피레네에서도 내가 걷는 길을 MTB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 역시 도움은 전혀 받지 않으셨다. 나의 순례길이기에 오로지 나의 힘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며 정중히 거절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


07.jpg 유모차에 타고있던 아이들이 내려와 자신들의 유모차를 끌고 갔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이 가족은 순례길에서 캠핑을 주로 하셨다고 한다. 개를 받아주는 알베르게가 잘 없어서였을까. 개와 함께 잠들기 위해 일부러 텐트를 치고 잤다고 하는데 가만 보니 유모차 안에 수많은 인형들이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깜깜한 밤에 꼭 안고 자는 소중한 인형들이겠지 하는 생각에 이내 미소가 지어졌다.




산타 카타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오늘 너무 덥다’였다. 가까이 보이는 알베르게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놓고 카페로 내려가 간단히 배를 채울 하몽과 바게트, 맥주를 주문했다. 동네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모이는 카페를 겸하고 있는 알베르게여서 그런지 동네 사랑방에 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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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와 마을을 구경했다. 이 마을은 유난히 벽돌로 지어진 집이나 건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가이드북을 보니 바람이 강한 곳이라 벽돌을 사용해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순례길 위에 있던 다른 마을들처럼 집을 허물어도 벽은 그대로 남겨두어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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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지방에 넘어오면서부터는 달팽이보다 토끼가 많이 보인다. 종종 보이는 도마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봤던 동물은 토끼가 아닐까. 오늘은 일반도로부터 시작해서 달팽이길, 안개길, 논밭길, 오솔길, 숲길 그리고 마을길을 걸었다. 걷다가 토끼굴도 보고, 개발자국도 보고, 고양이도 보면서 즐거웠던 오늘. 건물 몇 채 없는 작은 마을에 하나뿐인 알베르게에서 밤을 지새우는 오늘. 오늘도 아름다운 하루가 지나갔다. 아스토르가와 폰페라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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